Collective Collection: 이연숙

20 October - 7 November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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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닐봉지에 딸려온 기억 

이선영(미술평론가)
이연숙이 근래에 주로 사용하는 재료인 비닐 봉투는 소비 자본주의의 대표적인 산물이다. 주로 일회용으로 사용되며, 상품을 담아 오고 상품이 사용된 후 폐기될 때도 그 안에 담겨져 버려진다. 무엇인가 담아오는 비닐과 쓰레기를 싸서 버리는 비닐 사이의 어딘가에 현대인의 물질적 삶이 놓여있다. 그러나 상품과 쓰레기의 차이는 점점 좁혀진다는 점에서, 현대 소비사회는 임박한 재난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물질은 정신과 분리불가능하기에, 작가는 물질을 담아오고 버리는 비닐을 활용하여 기억을 짜고 푼다. 지저분하게 묻어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미끌거리는 포장지에 작가는 조밀한 촉각성을 부여함으로서, 깔끔한 분리 이면과 틈새로 버려지고 잊혀 진 것들이 줄줄이 딸려오게 한다. 기억의 문제가 얽혀 있기에, 작품 속 비닐은 작가 자신이나 누군가가 사용한 것일수록 좋다. 일종의 재활용이지만, 쓰레기의 예술로의 고양이므로, 작가 말대로 ‘업 사이클링’이라고 할 수 있다. 비닐은 멋진 꽃이나 샹들리에 등으로 재탄생한다. 꽃은 비닐봉투의 물리적 취약함과 순간적 사용, 샹들리에는 비닐의 피상성과 뻔지르르함이라는 상징과 연결된다. 
조각을 전공했던 이연숙의 작품에 비닐이 등장한 것은 자신의 일상적 삶과 밀접하다. 영국에 유학 가서, 한집에서 냉장고를 공동으로 사용해야 하는 상황에서 우유나 빵 같은 일용 식품을 조금씩 매일 사야만 했던 것이다. 그녀는 매일 쇼핑한 봉지로 매일을 기록하곤 했다. 작품 [diary]는 매일 사용한 형형색색의 비닐봉지를 매일 떠서 죽 붙여놓은 것이다. 사용된 봉지는 꽃이 되고, 아래에는 비닐의 원 형태로 늘어져있다. 작품 [re-use me]에 사용된 신라면 봉지처럼, 가장 많이 소비되는 상품의 상표가 노출된 경우도 있다. 이러한 작품들은 매일의 소비와 생산이라는 일상성이 강조된 것이다. 현대인은 그가 소비한 것을 통해 규정될 수 있다. 보통사람들은 소비자로 머물며, 영원한 소비자가 되기 위해 열심히 노동해야 한다. 이연숙은 작가이기에 소비를 또 다른 생산으로 고양시켰다. 가난한 유학생으로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이런 저런 일을 하면서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기 때문에, 자투리 시간을 이용하여 짬짬이 할 수 있는 작업 방식이 생겨났다. 코바늘뜨기나 바구니 짜기가 그것이다. 
비닐봉지를 잘라 실처럼 길게 만들고, 꽃한송이처럼 작은 단위로 완성될 수 있는 형태를 만들고, 전시 때는 설치의 방식으로 공간화 한다. 뭉치면 작지만 펼쳐놓으면 공간을 가득 채울 수 있는 비닐은 시공간을 고무줄처럼 융통성 있는 것으로 만든다. 길게 잘려진 비닐을 짬으로서 시간은 공간화 된다. 때로 열로 접착하여 패턴을 만들기도 한다. 시간은 순차적으로 또는 한 번에 응축되어 또 다른 형태--가령, 작품에 많이 등장하는 집--를 만들고, 무엇인가를 담을 수 있는 잠재태가 된다. 비닐봉투로부터 시작된, 담는다는 비유는 여러 층위로 반복된다. 이연숙은 비닐봉투를 자르고 짜서 기억을 담는다. 비닐봉투는 30대 중후반인 작가에게 어린 시절 엄마와 놀던 기억을 매개한다. 작가에게는 큰 비닐로 원피스 만들고 놀던 기억, 연처럼 끈으로 묶어서 뛰어 다니던 기억 등이 있으며, 여러 모로 비닐봉지를 재사용하기 위해 딱지 모양으로 접어 모아 놓는 습관을 어머니처럼 반복한다. 늘 무엇인가를 직접 만들어주신 어머니의 손길을 자신도 모르게 따라하고 있었던 것이다. 낯선 이국에서의 고생스러운 삶은 어머니와 함께 했던 따스한 시공간을 기억하게 했다. 
한국에서 진행한 어머니와 아이가 함께 하는 워크샵은 어머니 기억을 옮겨주는 작업이다. 비닐봉지에 어머니와 함께 한 아이의 기억을 그린 것을 코바늘뜨기로 하면 미지의 풍경이 나온다. 희미해지거나 잊고 있던 기억으로 풍경을 만든 작품 [situation]은 말려지고 펼쳐지는, 사용되고 사라지는 기억을 두루마리 화장지와 비교했다. 기억하지 않으면 가치를 잃는 것들을 워크샵을 통해 계속 수집한다. 기억은 소비처럼 순간적이며 사라져 가는 것이다. 그것들은 다시 호출되고 재사용된다. 이연숙은 대량생산과 소비라는 현대의 사회적 현상을 개인의 기억으로부터 풀어낸다. 자연과 상극에 놓인 비닐봉지는 기억 속에서 자연과 어우러진다. 기억이 꼭 고풍스러운 것으로부터 촉발되는 것만은 아니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세대에게 상품화된 세계는 또 다른 자연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상품은 자연보다 생성과 소멸의 주기가 빠르므로 더욱 격세지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작품 [sunset & sunrise]는 둥글게 짠 판에 주황색 비닐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그것은 일출 일몰과 관련된 기억과 관련된 이미지이다. 지평선처럼 연출된 띠 아래에 연두색 비닐봉지들이 매달린 작품 [green horizon]은 미루나무가 죽 심어진 개울 길에서 물에 비친 나무들에 대한 기억을 형상화한 것이다. 
노동력을 투여하여 밀도 있게 짜여 진 윗부분과 비닐의 나머지 부분이 중력을 받아 아래로 늘어진 구조는 많은 작품, 가령 [lotus on moody water], [re-use me-creature]에 등장한다. 마치 수면 위의 의식과 수면 아래의 무의식의 관계처럼, 꽉 짜인 구조와 느슨한 구조의 대조이다. 그것은 진흙 위에 핀 연꽃처럼, 버려지고 잊혀 질 것들이 피워낸 미의 결정체들인 것이다. 이러한 이원적 구조를 통해 잠재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이 연결된다. 그것은 작품 [chandelier]나 [jerwoodspace]처럼, 방으로 상징된 인공적으로 구획된 공간 속에 매달려 있기도 하다. 작품 [contemplation]이나 [mother & her mother-barge house]처럼, 하나로 완성된 단위를 넘어서 설치로 확장된 작품은 얇게 펴지고 연결되어 기억이나 사색의 공간으로 변화한다. 이때 사용된 비닐의 색은 여러 가지 기분을 환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가령 공간을 가득 채운 붉은 색은 그 안에 들어선 관객으로 하여금 아련하고 숙연한 느낌을, 노란색은 밝고 따뜻했던 추억을, 무지개 색은 행복과 희망을 떠오르게 한다. 꼼꼼한 공예적 속성이 이런 저런 방식으로 공간을 점유하면서 설치미술로 변모한다. 
이연숙이 사용하는 비닐봉지는 대량 생산품이지만 지역마다 특성이 있으며, 작품을 통해 시간성이 부여된다. 이 익명적 상품은 개인이 처한 특수한 시공간과 함께 짜여 진다. 똑같은 단위 구조를 이루는 비닐봉지는 작품을 이루는 단위 구조로 재탄생한다. 아무 특징이 없던 중성적 용기는 다시 전체성, 자연성, 통일성 따위의 유기적 속성을 부여받는다. 이연숙의 작업 방식인 뜨기와 짜기는 유기주의(organicism) 즉, 돈 슬레이터가 [소비문화와 현대성]에서 말하는 근대 이전의 삶을 함축한다. 즉 그러한 삶은 자연 환경과 한해의 리듬에 이르기까지 오래된 경험으로부터 질서정연하게 패턴화 된 생활 예술과 삶의 방식을 만든다. 유기주의는 기술적인 노동 분화의 수준이 낮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산력은 낮지만 생산력과 관련된 사회적 모순도 그만큼 덜 심각하다. 유기적 공동체는 전체적 사회이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서로서로 사회적 위치를 잘 알고 있는 세계 내에서 직접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한 장소이다. 전통사회를 무너지게 한 것은 특정한 세력이기 보다는 화폐 화 된 모든 형태의 부이다. 모든 사회관계, 사회행위, 사회대상은 상품으로 교환된다. 
돈 슬레이터에 의하면 이는 근대세계가 이룩한 가장 심오한 세속화이다. 어떤 사물이나 행위, 경험이 상품화되거나 상품으로 대체될 수 있는 잠재력은 일상의 친밀한 세계를 점차 시장과 시장가치의 익명세계에 위치시킨다. 근대는 소외, 기계주의, 사회적 분리를 낳는다. 수지 개블릭는 [모더니즘은 실패했는가]에서 근대 이전, 즉 전통의 사회적 기능의 하나는 안정성을 높이고 그래서 변화를 방해하는 것이다. 전통은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관계체제를 만들었는데, 이것은 개인을 사회질서 안으로 배치시키고 사회적 의무와 책임 망을 구축하는 것을 도와준다. 그러나 근대는 파괴적인 상대주의와 과격한 주관성으로 인간을 멀리 이동시켜 놓았다. 개별 소비자가 물건을 사서 담아가는 낱장의 비닐봉지가 근대의 상징이라면, 뜨기와 짜기, 그리고 설치로 재활용된 비닐봉지는 소외를 낳는 근대적 의미의 단편화를 극복하려 한다. 낱장의 비닐봉지는 만물의 시장화로 집약되는 경제적 합리화와 그것이 향해있다고 믿어지는 유토피아를 상징한다면, 개별적 특성이 부여된 이연숙의 비닐작품은 근대세계의 물질주의와 형식적 합리성이 추구하는 부가 아니라, 가치를 낳는다. 특히 그것은 소비를 통해 창출된 상징적 가치이다.
돈 슬레이터에 의하면 부의 생산(실제로는 가격)은 절대적이건 상대적이건, 거대도시이건 개발도상국이건 빈곤, 착취, 불안정성을 지속적으로 초래했다. 근대는 보다 많은 물건이 생산되며 사회생활이 점점 더 사물형태, 즉 물화(reification) 되어간다. 비(非)근대세계는 물질적 희소성의 사회이며, 고유한 형태의 억압과 부정의, 착취에 의해 제한받고 지배받았으나 소외되지는 않았다. 사회학자들은 근대성이 점차 행정과 통제, 계산이라는 공식적이고 객관화된 체계, 양화, 방법 지배와 규율에 의해 특징 지워졌다는 것에 주목한다. 비닐봉지는 많은 물건을 소비하게끔 지향된 삶의 필수품이다. 비닐로 감싸인 일회용 포장이 아니라면, 저 곳에서 생산된 것 것들이 이곳의 시장에서 낯선 소비자를 만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부를 소수에게 점차 집중시켜 나가는 세계화 시대에 보편적으로 일어난다. 이연숙의 비닐봉지는 분리와 규격화에 근거하는 대량 생산과 소비를 상징한다. 그것에 다시금 육체적 노동과 시간을 투여하는 것은 그저 일상을 재생산하는 것 이외에 특별한 목적이 없는 생산과 소비의 주기를 늦추는 행위이다. 그것은 맹목적인 빠름에 대항하는 이유 있는 느림이다. 
근대세계를 추동한 발전이나 진보는 과거보다 미래에 초점을 두고 나아간다. 그러나 여러 가지 부작용에 의해 그 방향성 자체가 의문에 붙여졌을 때, 과거는 대안적 가치의 저장고로 반복해서 회귀할 만한 때가 된다. 스며들지 않고 사라지기 힘든 비닐이라는 완강한 근대적 대상은 역설적으로 시간 여행을 위한 매개가 된다. 그것은 단순히 낭만적 과거로의 회귀나 향수가 아니라, 현재에 대한 비판이고 소비사회의 대안이 될 수 있는 ‘오래된 미래’에 대한 상징으로 다가온다. 현재에 대한 소격은 어린 아이의 시점을 회복함으로서 가능하다. 먼 이국에서의 작가는 모든 것이 신선하게 다가왔던 유년 시절을 떠올리며, 스스로가 처한 현재의 상황을 낯설게 만든다. 풍요로운 소비를 위해 지루한 직업적 노동을 견뎌내야 하는 이에게 생산 및 소비의 매개물은 장난감으로, 예술품으로 변모하는 것이다. 자신만의 놀이 또는 작업을 위해 온전한 비닐봉지를 잘게 찢어내는 행위는 뭔가 공격적인 충동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소극적 거부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만이 담고 싶은 것을 담을 수 있는 ‘봉지’를 재생산하는 것이다. 
이 봉지는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을 수 있는 공간이 된다. 잃어버린 시간은 고정되어 있는 어떤 과거의 명확한 재현이 아니다. 그램 질로크는 [발터 벤야민과 메트로 폴리스]에서 베를린 유년시절을 상기하는 벤야민에게 과거의 중요성은 특별한 현재와의 관계 속에서만 드러난다고 본다. 그렇기에 베를린에 대한 글은 과거, 현재, 미래라는 개념의 복합적인 유희이다. 벤야민은 잃어버린 시간을 다시 찾고자 하지만, 오히려 잃어버린 시간 찾기는 미래를 향하며 미래로까지 연장된다. 그는 출현할 사물들을 위해 과거를 회복한다. 작가에게 과거는 끝이 없고 되돌릴 수 없는 성격을 가졌을 뿐 아니라 열려 있는 것이고, 현재 속에서 변형되는 대상이다. 회상은 미래를 지향하기에 완성되지 않은 것이다. 여기에서 기억은 끝나지 않은 순간들에 대한 회상이다. 그것이 그램 질로크가 요약하는 벤야민의 역사와 구원 개념의 기초이다. 이연숙의 재료와 작업방식은 미로 같은 시공간 속에 던져진 현대의 작가가 길을 찾는 방식이다. 뜨거나 짜거나 설치되기 위해 둘둘 말려진 비닐 끈은 기억의 실마리가 되어, 봉지만한 작은 집부터 거대한 환경까지 포괄하면서 시간과 공간의 긴밀한 상호작용을 이끌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