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untry Road: 문영미

13 October - 5 November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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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ss release
「악의 꽃」, 「파리의 우울」로 대표되는 프랑스 시인 보들레르(Charles-Pierre Baudelaire)는 파리라는 도시를 시적 상징으로 보았다. 19세기 막 시작된 새로운 문명은 도시를 하나의 이념으로 상징화시켜 끊임없는 실험을 감행했다. 오래된 낡은 성벽을 무너뜨리고 큰 도로를 만들고 경계선을 확장하여 거대도시로 탈바꿈한 도시는 타자화된 인간을 낳았다. 소외된 인간이 머물 수 없는 대도시의 거리엔 수많은 산책자들이 모여들었고 풍경이 된 도시와 외로운 자신들을 바라보았다. 끝없이 펼쳐지는 콘크리트 바벨탑의 욕망은 인간을 우울한 현대화로 내몰았다. 보들레르의 시적 상징은 유배된 인간을 위한 서글프면서도 아름다운 도시의 속삭임이었다. 이러한 현대성을 드러내는 달콤한 산업화는 도시와 인간의 삶 전체를 변화시켰다. 마찬가지로 19세기 조선의 초가지붕 위로 불어 닥친 개화의 물결은 망국의 역사를 뒤흔들었다. 한 세기가 지난 지금 그 땅 위에서 우리는 전혀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 
 
초고층 빌딩 숲으로 둘러싸인 도시 한복판에 오래된 집 한 채가 있다. 사람들은 그 집을 허물어 화려한 빌딩을 짓자고 했고 재개발이라는 딱지를 붙였다. 그렇게 오래된 추(醜)한 집은 아름답고 선(善)한 집이 되었다. 현대화의 전략은 이런 선한 도시를 만드는 것에 있지 않은가? 그리하여 끊임없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콘크리트 집적물들을 세우고 있는 것이 아닌가! 다시 도시로 돌아가 보자. 거기엔 오래되고 낡은 집이 한 채 있다.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산 흔적들을 간직한 집, 우리들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는 소시민의 집이 있다. 그 집은 오랫동안 이 땅을 지켜왔다. 한국전쟁 이후 폐허가 된 이 땅에 세워진 집은 비와 바람을 피하기 위한 얇은 판자 집이었고, 이후 경제개발과 새마을 운동의 영향으로 점차 집의 형태를 갖추었다. 본격적인 도시화의 시대엔 그 집은 아파트로 대체되었고 현재는 아파트가 집의 상징이 되었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수많은 오래된 집이 있지만 아직도 역사의 기억을 모두 머금은 낡은 집들이 사람들의 키 높이로 내려와 조용하게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도시화의 시각에서 그 집은 단지 새롭게 개발되어야 할 추하고 더러운 집이다. 이 남루하고 오래된 집들이 우리들의 삶과 흔적들을 고스란히 기록하고 있는 가장 한국적이자 아름다운 집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오래되고 낡은 집, 그 집을 그리고자 하는 작가 문영미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도시 한가운데 혹은 도시의 외곽엔 낡고 남루한 집들이 많이 있다. 그 집들은 재개발을 기다리는 추한 가옥이 아니라 낡았지만 사람들이 애정을 담아 고치고 또 고친 손길 가득한 건축물이다. 비록 한옥과 양옥, 지붕과 콘크리트 벽들이 뒤섞인 어떠한 양식도 드러내지 않고 있지만 나름의 스토리와 감성을 지니고 있는 집이다. 문영미는 이러한 집들에게 다가가 살며시 말을 건넨다. 소곤소곤 따뜻한 이야기를 하지만 직접 그 사람들의 삶 속으론 들어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집 속엔 현대화를 꿈꾸는 사람들의 열망이 잠자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집이라는 것도 사회적인 산물임을 부정할 수 없다. 적정의 거리를 유지한다는 것은 어쩌면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과 흔적을 읽어내는 더없이 좋은 방법이기도 하다. 그녀는 그렇게 도시를 거닐며 소시민들의 집을 하나 둘씩 읽어내려고 노력한다. 그렇기에 오래된 집은 쓸쓸하면서도 적막하진 않다. 거기엔 적정의 조화가 있기 때문이다. <덩굴집>의 호박 덩굴조차 적절하게 자신이 뻗어나갈 정도를 지키며 집과 하나가 되었다. 과하지 않고 적당하게 다른 문화를 받아들인 선인들의 지혜가 드러난다. 그것은 도시를 욕망하는 사회적 집과 현실의 집 사이에서 선택되는 절충의 혜안과도 같다. 문영미는 도시의 낡은 집에서 이러한 포용의 미를 발견한다. 그것은 단지 지붕 하나 창문 하나 일일이 매만져 자신의 삶을 가꾸고자 한 사람들의 노력이 아니라, 삶을 유지하기 위해 용도를 변경하고 여러 자재를 덧붙여 모두 함께 살고자 한 삶에 대한 강렬한 의지를 드러내는 미이다. 어쩌면 변변찮은 수입에 자녀교육과 결혼, 가족의 행복을 위해 몸 받친 아버지의 노고가 물들어 있는 집일 수도 있다. 그녀는 바로 이러한 삶의 얼굴을 읽어내고자 한다. 이 땅 위에 세워진 집과 그 집에서 고난과 사회적 변화를 함께 겪어온 우리 자신들의 얼굴을 드러내고 싶어하는 것이다. 
우리들이 살아 온 역사의 자화상이 오래된 집이라고 한다면 우리들은 지금의 삶을 가능하게 한 가장 한국적인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기와지붕과 열려진 대문, 그리고 집밖을 향한 작은 흔적들이 소리치는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다. 어쩌면 조악하고 초라해 보이는 솔직하고 숨김없는 우리 자신들의 모습 말이다. 작품 <사우나>를 살펴보자. 전면으로 드러나는 네모난 건물에 붉고 노란 타일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그 모양이 패턴화 된듯하지만 어떠한 통일감도 없이 이리저리 뒤섞여 있다. 그러나 전체가 조화를 이루며 편안하게 자신의 얼굴을 드러낸다. 현대성의 도시 한복판에서 말이다. 마찬가지 시선으로 <신영민박>이나 <성우치킨>을 살펴보자. 여기엔 다닥다닥 서로의 삶을 맞대고 살아가는 다가구주택의 얼굴이 드러난다. 없애야 할 재개발의 위협이 아니라 서로의 삶을 이해하고자 하는 따뜻함과 편안함이 파스텔색의 부드러움으로 잘 표현되어 있다. 바로 낡고 오래되었지만 정감 있는 우리들의 집 풍경이다. 
 
도시를 ‘인간과 돌들로 이루어진 기괴한 집적물’로 바라본 보들레르의 시적 상징은 위협적이지만 매혹적인 풍경으로 다가온다. 삭막한 도시는 자연의 대치어가 아니라 그 속에서 목가적인 서정성의 가능태를 찾아낼 수 있음을, 지저분하고 가난한 빈민촌의 철거가 선(善)의 지향이 아님을 도시의 삶은 우리들에게 직접 경험하라고 말한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도시의 얼굴과 그 속에서 꾸준하게 삶을 이어가는 우리들의 모습은 단지 만날 수 없는 우울함이 아니라 이미 체화된 집의 형태로 드러난다. 그러나 그 집은 단순히 우리들의 얼굴을 재현하는 건축적 구조물로서가 아니라, 현실의 진솔함과 삶의 기억을 기록하기 위해 두터운 물감 층을 덧칠하는 낡은 집이다. 소외된 산책자를 받아들이는 따뜻하고 정감어린 남루하지만 화려한 우리가 살아가는 집이다. 백곤, 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