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istlers: 박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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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조선은 2024년 8월 2일부터9월22일까지 박보나의 개인전 《휘슬러스 Whistlers》를 개최한다. 예술과 삶, 노동 사이의 경계에서 글을 쓰고, 작업을 해온 박보나는 이번 전시에서 여성의 우정을 이야기한다. 여기서 작가가 말하는 우정은 서로를 응원하고 지지하는 마음을 의미한다.
전시 《휘슬러스 Whistlers》는 박보나와 탈성매매여성 지원단체 ‘WING 윙’과의 인연에서 시작한다. ‘윙’은 1953년 전쟁 고아나 과부를 돌보기 위해 설립된 단체로, 1996년 이후로는 탈성매매 여성 및 폭력 피해 여성들을 지원하고 있다. 박보나는 우연히 ‘윙’에 대한 기사를 읽고 글을 쓰는 것으로 시작해, 그곳의 여성들과 같이 밥을 먹기도 하고 워크샵을 하기도 하면서 인연을 이어왔다. 박보나는 《휘슬러스 Whistlers》가 자신과 분리된 바깥에 대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일부로 자리 잡은 바깥, 즉 여성들과의 우정에 대한 전시라고 말한다.
전시 제목과 같은 제목의 작품 〈휘슬러스 Whistlers〉는 2023년 워크샵에서 ‘윙’의 여성들과 같이 만든 것으로, 열 두 명의 여성들이 서로의 숨을 들이마시고 다시 내쉬면서 옆 사람의 휘파람을 이어 부는 퍼포먼스 영상이다. 서로 숨을 보태 주는 마음은 시가 되어 작가의 지인들이 기부한 티셔츠에 〈휘파람 부는 법 How to Whistle〉(2024)으로 새겨진다. 〈휘휘파파 Phwee Phwee Fweet Fweet〉(2024)는 여성들이 자신의 친구에게 쓴 손 편지 여섯 통을 두 명의 배우가 읽는 영상 작업으로, 언어와 논리를 넘어서는 감정적 친밀함을 속삭인다. 그 친밀함은 2023년 ‘윙’의 워크샵에서 했던 좋아하는 것을 손에 쥔 마음을 그린 <산 Mountains>(2024)로 이어진다.
박보나는 미술 속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방식과 그것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노동을 미술 밖의 경제 및 역사의 작동방식과 겹쳐 놓음으로써, 사회 시스템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작업을 한다. 전시를 만든 미술관 관계자들의 취향을 조사해 저녁장을 봐주고 오프닝에서 들고 다니게 하는 퍼포먼스 〈봉지 속 상자 La boîte – en – sac plastique〉(2010)나, 전시기간 동안 미술관을 지키는 분들에게 탭 댄스 슈즈를 신겨 미술관을 균열 시키는 소리를 내는 퍼포먼스 <당신이 믿고 있는 것을 말해드립니다1>(2013), 그리고 카메라 뒤에서 이미지를 생산하는 폴리아티스트와 협업한 여러 작업들을 통해 박보나는 예술과 삶, 노동의 경계를 흐리며 그것에 대해 불편한 질문을 해왔다.
갤러리 조선에서2013년에 열렸던 첫 개인전 《친구들 Friends》이 피아노를 치는 퍼포머, 구두닦이 노동자 등, 전시를 만들기 위해 협업한 사람들에 대한 것이었다면, 이번 《휘슬러스 Whistlers》는 그러한 협업이 자리잡는 과정에서 창발하는 신뢰와 우정, 친밀함을 이야기하는 전시라고 할 수 있다. 작가가 얘기하는 다정한 관계는 선명한 언어가 아니라, 편지를 건네는 눈빛과 목소리, 열린 형상과 시, 서로에 대한 이해와 배려 및 함께 마시는 숨이 되어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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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na Park’s Whistlers: Friendship as a Form of Exhibition, Collaboration as a Form of Friendship
박보나의 <휘슬러스>:
전시의 형태로서 우정, 우정의 형태로서 협력
타자 속의 자신과 함께 하기
to be with oneself in the other
-G.W.F. Hegel, Phenomenology of Spirit
누군가를 위해 밥상을 차려본 적이 있나요? 박보나의 개인전 <휘슬러스>는 탈성매매여성 지원단체 ‘WING 윙”과의 인연에서 시작한다. 박보나는 ‘인간의 자립과 재활을 스스로 밥을 차려 먹을 수 있는 의지’로 설명하는 최정은 대표의 인터뷰를 우연히 발견하고, 교감과 치유의 장소로서 밥상을 예술의 자리로 옮겨온다. 지구의 위기와 시대의 쟁점들로 점철된 현대미술의 거대담론 속에서 함께 나눌 수 있는 작은 밥상을 차리는 박보나는 비평의 지평을 넓히는 ‘담론’이 아닌 우리의 배를 든든하게 해줄 ‘우정’을 손에 쥔다. 친밀함의 장소로서 밥상, 이는 작가의 마음 속으로 깊이 파고든 한 여성의 실천을 주축으로 자신의 오랜 협력자와 가까운 인연 그리고 미래의 만남을 포개면서 전하는 연대의 메시지이다.
2007년의 박보나의 개인전을 계기로 그리고 2016년 비평가 매칭을 통해, 박보나와 나는 꽤 긴 만남을 이어왔고, 서로의 예술과 삶에 대한 크고 작은 고민을 나누고는 했다. 나는 가끔 박보나를 초대해 밥을 해주기도 했고, 요즘은 자주 강아지 산책을 함께 한다. 때때로 함께 퍼포먼스를 보러 다녔고, 돌아오는 길이면 각자의 날 선 의견을 주고받고는 했다. 다음 날 그리고 그 다음 날로 이어지던 문자는 그로 인한 쓸데없는 오해를 보듬거나 불필요한 편견을 덜어주면서 서로의 사유 방식에 익숙해지던 차였다. “아는 언니가 밥을 먹으러 오라는데 같이 갈래요?” 가끔, 때때로, 함께 하고, 보듬거나 덜어주면서 익숙해진 이 시간은 덥석 나를 낯선 곳으로 이끌었고. 나는 이러한 시도를 전시를 위한 큐레이터와 작가의 새로운 도약이라고 해야 할지, 두 사람이 만들어낸 우연한 동행이라고 해야 할지. 이것도 저것도 아닐 수 있는 이 모호한 -그렇지만 당연한- 관계를 개념적 협업이나 합리적 동업이 아닌 문화적 친밀감(cultural intimacy) 혹은 친밀한 유대감 (intimate solidarity)같은 것으로 부를 수 있을까… 생각해본다.
우리는 살면서 여러 대상과 다양한 방식으로 우정을 경험한다. 그 대상은 형제나 자매, 동성과 이성, 반려동물이나 식물, 또는 물건이나 책과 마찬가지로 문학이나 미술이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때로는 이미 유령이 된 예술가나 사상가들 - 내게는 버지니아 울프가 그러한데- 과 거부할 수 없는 어떠한 친밀감 혹은 동질감을 느끼기도 한다. 이야기의 이야기의 꼬리를 잇는 시간을 통해, 서로 기대고 쓰다듬는 내맡김과 받아들임을 통해, 반복해서 읽고 덮고 펼치는 두께와 무게를 통해, 우리는 위로 받고, 배우고, 성장하고, 다시 일어선다.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지난 몇년간의 사회적 단절 속에서도 인간은 기술이라는 낯선 미디어를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원격으로 나마 가까운 이들의 소식을 구하지 않았던가? 아마도 이러한 정서적 유대를 기반으로 만들어지는 서로 간의 소속감은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 유지해야 할 최소 단위의 조건 없는 연대(unconditional solidarity) 일지도 모른다.
오랜 시간 여성은 주체적 존재가 아닌 수동적 대상으로 다루어져 왔다. 그렇기에 긴 역사 속에 언급된 우정에 대한 숙고, 아리스토텔레스, 몽테뉴, 블랑쇼, 레비나스, 푸코, 들뢰즈, 데리다와 같은 사상가들의 텍스트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우정에서 여성은 제외된다. 오늘날 까지도 남성의 우정은 당연하게 여기면서 여성의 우정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이유는 여기에 기인할 것이다. 나 또한 우정을 나눈 여러 필자의 서한집들이 가지고 있다. <카뮈-그르니에 서한집>, <시키와 소세키 왕복 서간집>, 릴케의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형제 테오에게 보낸 <반 고흐의 영혼의 편지>와 같이 편지라는 형식이 전하는 진실의 울림 속에 그 시대의 예술적 삶에 연결되고는 했는데. 이 역시 모두 남자들의 기록물이다. 아마도 여성은 오랜 시간 주체적 존재에서 제외되어왔기에 남성이 향유해 온 우정의 관계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제대로 기록되지도 정의되지도 못한 채 우정의 바깥 혹은 우정의 아래 은닉되어왔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자의 우정이란, 앞으로 우리가 다시 발견해 나가야 할 새로운 관계이자 지금이라도 되찾아야 할 오래된 친구가 아닐까?
그렇다면 남자들의 우정과 여자들의 우정은 진정 다를까? 남자들이 지켜내야 했던 패권 체계에서 만들어진 ‘굳은 맹세’와는 다르게 여자의 우정은 변화 무쌍한 삶과 함께 동반되는 무수한 순간의 선택들, 그로인한 깨달음과 실수, 새로운 욕망과 아쉬움 같은 지극히 주관적이면서도 일시적인 ‘숨겨진 감정’에 가깝다. 예술과 건축을 넘나드는 예술가이자 우정을 근본적인 동맹과 책임의 정치학으로 바라보는 연구자인 셀린 콘도렐리(Céline Condorelli)과 철학자이자 이론가인 요한 프레데릭 하틀(Johan Frederik Hartle)는 <바라보기에는 너무 가까운, 우정에 대한 소고>에서 생산적 개념으로서 우정에 대한 대화를 이어 나간다. 며칠 전 이 글이 수록된 책을 뒤적이다가 우연히 밑줄 그은 한 문장을 발견했다. “우리가 서로 비슷하게 생각한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서로를 위해 생각하고 함께 생각하는 활동을 하는 것이다.”이는 요한 프레데릭 하틀이 한나 아렌트와 그의 친구 메리 맥카시가 교환했던 25년간의 편지 에서 인용한 한 문장이다. 함께‘생각하는 활동’자체가 우정을 위한 작업이 될 수 있으며, 이러한 연유에서 우정은 작업에 필요한 조건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는 예술 활동을 하는 우리에게 협력의 또 다른 방향성을 제시한다. 그의 말 대로 우정의 가장 고상한 잠재력은 동료 사이의 지성이 서로 함께 발전하는 것에 있는 것이다
우정이라니, 너무 로맨틱한가요? 그렇지 않다. 박보나는 예술을 위한 예술의 바깥, 그 가장자리를 서성이며 이념적으로 표준화된 이미지의 뒤쪽/아래/주변 을 보살펴왔다. 그렇다고 그의 작업이 작품의 소유권이나 작가의 저자성을 비판하고 그 시스템에 도전하는 개념미술을 표방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작가는 각자의 현장을 지키고 있는 협업자들과의 제작 과정 속에서 만들어지는 상황들을 관찰하고, 창의적이고 기발하기까지 한 내러티브를 만들어낸다. 서로 다른 둘 또는 여럿의 개인이 함께 하는 창작 과정은 지극히 주관적이면서도 일시적이고 내밀하기 때문에 소위 말하는 노동, 타자 또는 협력과 같은 단어 속에서 미처 헤아리기도 전에 (마음 속에 깊이 새겨 지고) 이내 사라진다. 이러한 특수한 상황들을 보듬는 박보나에게 우정은 대안적 창작 방식으로서 혹은 공평한 세상을 위한 태도로서 작동된다. ‘우정은 더 이상 노동과 구분되지 않으며 공동의 상호적인 생산 과정 안에서 ‘정서적인 노동’으로서 뿌리를 내린다 .’
박보나의 개인전 <휘슬러스>에 소개되는 작업에는 계약자도 피계약자도, 피해자도 보호자도, 전문가도 비전문가도, 예술도 비예술도 없다. 다만 이 사이를 연결하는 환대와 신뢰, 연대와 우정, 그리고 친밀함과 다정함이 ‘임의적 동인’으로 잠시 머무른다. 그리고 그 공동의 자리를 빌어 박보나는 미술이 되어버린 타자의 삶을 타자의 삶 속에 살아있는 진실로 되돌려 보내는 우정 어린 선언을 시작한다. 옆 사람에게 휘파람을 건네는 윙 여성들의 입술에서, 소곤소곤 편지를 들어주는 배우의 귀에서, 한 땀 한 땀 바느질하는 보이지 않는 작가의 손이 전해오는 온기로 나의 입술을 오물거리고, 귀를 쫑긋 세우고, 손가락을 움직여본다. 작가로서, 큐레이터로서 그리고 개인으로서, 우리가 서로의 사유의 원천이 되어 각자의 세계를 조금씩 열어왔던 몇 해를 되돌아보며, 함께 나눈 시간이 협력의 과정이 되고 그와 함께 만들어진 우정이 전시의 형식을 만들 수 있다면, 아마도 이번 전시가 그 가능성을 열어주지 않을까… 이것이 <휘슬러스>가 속삭이는 휘파람일 것이다.
(글, 배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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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istl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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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st exhib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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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ternal exhib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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