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ty of Gaze: 정정주

7 January - 28 February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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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친근한 낯섦, 정정주의 도시 경험에 관한 미술
정정주 개인전 ‘응시의 도시 City of Gaze'
갤러리 조선
 
정정주 제 작업을 간단히 소개하자면, 건축물의 모형공간을 만들고, 그 비어있는 내부에 움직이는 카메라를 설치해서, 건축모형과 작품이 설치된 전시장이라는 내. 외부 공간을 영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제가 살던 집의 거실이나, 매일 지나치는 일산의 한 쇼핑몰과 같은 실제 공간을 모델로 한 만큼 저와 건축물 사이에 직접적인 교감이 있었다면, 차츰 일본이나 중국의 도시 같이 직접적으로 관계가 없는 공간을 다루게 되면서 실재감을 잃어버리게 되더군요. 이제까지 전시주제가 ‘응시의 도시’였는데, 올해 6월에 김종영 미술관에서 있을 개인전의 주제를 ‘환영(Illusion)' 이라고 잡은 이유가, 아마 그런 변화 때문일 것입니다. 
 
강수미 얘기를 들으니 우선 기본적인 질문부터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정정주 작가에게 도시는 어떤 식으로 정의되나요?
 
정정주 도시라는 집합체를 처음 만든게 2006년 [덕이동 로데오 거리]입니다. 그 공간을 처음 가보고서 ‘아 여길 만들어봐야지’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바로 모형 제작을 시작했습니다. 그 다음엔 상하이에서의 전시를 할 때 큰 규모의 복합 쇼핑 센타로 재개발된   [젠다이 플라자]를 만들었습니다. 전시가 있었던 젠다이 미술관도 이 젠다이플라자에 속해 있습니다. 이 설치 작업과 함께 중국 신문에 난 ‘신기루 도시’에 대한 기사를 통해 도시에 대한 구체적인 관심을 갖게 됐던 것 같습니다. 중국 서해에 가끔 엄청나게 큰 신기루가 뜬다고 합니다. 바다에 갑자기 거대한 도시가 생기고, 몇 시간 뒤에 사라지는 거죠. 상하이의 [젠다이 플라자]를 설치하고서 저도 도시가 신기루 같다는 느낌을 많이 가졌었습니다. 
 
강수미 작가의 경험을 제가 여기서 유추해보면, 도시에 대해 처음 인식한 내용은 ‘신기루, 환영으로서의 도시이미지’인 것 같습니다. 이를 정정주 작가가 머리속에 그리고 있는 자기 작품의 상태, 이미지를 설명하듯이 생각해보면 다음과 같은 것 아닐까요. 실체는 땅에 발붙이고 물질적으로 있어요. 그런데 그런 실체로서의 도시에서 실체감이 점차 없어지고 물질의 무게, 볼륨이 다 빠진 상태로, 즉 외관만으로 도시가 존재하는 거죠. 일종의 아주 얇고 가벼운 피부처럼, 굳이 비교해보자면 작가 서도호의 아주 고운 비단 천으로 만든 집 같은 이미지, 그런 상태의 도시를 생각한 게 아닌가요?
 
정정주 저도 제가 생각하는 도시의 이미지를 구체화하기가 어려운 것 같아요. 그래서 결론을 열어둔 상태에서 작업을 진행해 왔습니다. ‘응시의 도시’라는 전시를 준비하면서 처음에는 별다른 계획 없이 일단 건물을 많이 만들자는 생각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97년 일본 개인전 때 나고야 전시장 주변의 재개발로 헐릴 예정인 주택들을 모형으로 만들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상하이에서의 전시와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우리나라의 일산이나 중국 상하이의 UFO건물들과 작은 규모의 빌딩들이 들어오게 됐습니다. 이 과정에서 모형화할 건축물의 선별 기준이 생겼던 것 같아요. 일본에서의 작품은 사적인 공간이 많았던 것 같고, 그 다음에 규모가 커졌는데, 텅 빈 빌딩을 많이 만들었어요. 어쨌든 도시를 다니면서 지속적으로 관찰을 하게 됩니다. 건축물을 선별하고 모형화하고, 카메라 설치와 연결시키면서 제 경험과 기억들이 지속적이고 구체적으로 반영돼 가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가 도시에서 경험했던 이미지들이 작품에서 드러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마비된 상태, 혹은 절연돼 있는 상태..., 인간적인 관계가 절연돼 있다기 보다는, 감각이 굉장히 혼란스러운 상태 같은 것이죠. 
 
강수미 정정주 씨가 2006년 일산의 덕이동을 모델로 작품을 하던 당시 매우 흥미롭다고 생각했죠. 다국적 건축양식이라고 규정하기에는 어딘가 더 복잡하고 기이한 형태의 쇼핑몰을 건축모형으로 만든 작품이, 일산이라는 신도시가 갖고 있는 정체성을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거든요. 그런데 정정주 작가의 작품의 경우, 건물 모형작품과 더불어 외부에 투사된 영상이미지들도 기이해보여요. 공상과학(SF)영화에나 나올법한 UFO 형태의 모형 건축물, 그리고 그 모형 건축물 속에서 움직이는 작은 카메라에 찍힌 이미지들이 매우 강렬한 환영의 공간을 만들어내기 때문이죠. 이번에는 그런 상태를 더 발전시켜보는 건가요?
 
정정주 지금 스튜디오에 늘어놓은 모형들은 일본 나고야에서 채집해 만든 건물 모형들과, 한국에서 모은 것, 그리고 중국 상하이의 건물들이 같이 모여 있습니다. 중국 개인전부터 일종의 ‘상황’을 만들어 보자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처음에는 회전하는 빛을 만드는 방식으로 이어졌죠. UFO건물은 서치라이트처럼 강한 빛을 비추면서 서서히 돌아갑니다. 이 빛이 옆에 있는 건물들의 창문을 통해 모형 내부로 비쳐지는데, 그 모형의 내부에 있는 카메라가 찍는 영상은 다시 밖으로 영사돼, 마치 건물 밖의 차가 지나치며 건물을 비출 때처럼, 공간 안에 빠르게 휙 지나가는 빛의 분절을 만들어 냅니다. 
 
강수미 운동이네요, 빛의 운동
 
정정주 예. 빠르게 공간안을 지나가는 빛의 속도감이 흥미로웠던 것 같습니다. 마치 감시하는 듯한 빛의 움직임과 긴장감은 제 기억 속에 침전된 ‘마비된 도시’의 느낌을 떠오르게 했어요. 80년 광주민주화 운동 때와 87년 한참 데모 많이 할 때, 한 달 넘게 광주 시내가 돌맹이랑 유리조각으로 가득차고, 대중교통은 완전히 마비돼서 시내에서 집까지 걸어 다녀야 했어요. 당시에 몸이 기억하고 있는 경험이 최근 되살아났죠. 도시가 마비되고, 사람들이 있지만 사람과 건물이 제 기능을 멈춘 그 사이를 걸어서 집까지 가야했던 느낌들. 처음 이 ‘응시의 도시’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몰랐는데, 차츰 더 많이 떠오르게 됐던 것 같아요. 불안정하면서도, 외부를 향한 호기심과 두려움이 작업 속 카메라의 시선에서도 더 많이 보이게 되는 것 같고요. 설치된 건물들 사이에 빌보드처럼 모니터들이 설치되고, 카메라에서 찍은 영상을 보여줘요. 건물 속의 카메라들이 이 영상을 다시 찍게 되면서 빛의 움직임과 영상 속 공간의 움직임, 그리고 카메라의 움직임들이 섞이면서 복잡한 움직임들의 결합을 만들게 되요. 
 
강수미 도시가 마비되는 상태, 도시가 제 기능을 상실하고 물리적 공간으로만 존재하는 상태를 미술작품의 주제로 삼은 점이 흥미로운데요. 제 기억에 의하면 일본 나고야나 중국 상하이 전시를 할 때까지만 해도 정정주 작가가 그런 생각을 많이 하진 않았던 것 같아요. 그때는 ‘건물들과 건물들 간의 관계, 건물 내부의 어떤 사람이 밖을 보는 방식 대(對) 밖에서 어떤 특정 집의 내부를 궁금해 하는 시선’, 이런 것들에 작업의 비중을 더 두지 않았나요? 그런데 지금 얘기는 상당히 문화비판적인 시각에서 도시를 논하는 미술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도시가 산업화될수록 도심이 비는 현상, 즉 ‘도심 동공화(洞空化)’ 말이죠. 그에 대한 위기감이 작품의 내러티브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여기서 제가 말하는 도심 동공화는 물리적으로 다 사람이 빠져나가고 베드타운이 되는 현상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달리 말하면 도시 자체가 내외적 기능을 상실하고 물질적인 상태로만 남은 것을 뜻해요. 사람이 비는게 아니라 기능 자체가 비어버리는 것. 도시가 이럴 때 도시인들이 느끼게 되는 심리상태가 어떠하냐, 이런 것에 정정주 작가가 관심이 있는 것 같아요. 
 
정정주 네 갑자기 귀를 막으면 먹먹해지는 것처럼 순간적으로 비는 것, 마비되는 것이죠. 도시가 비는 심리적인 상태를 제 말로 표현하자면 그래요. 
 
강수미 정정주 작가의 ‘도시가 마비된다’라는 발상과 제가 말씀드린 ‘도시가 동공화(洞空化)된다’에 생각의 살을 붙여보죠. ‘도시가 마비된다’, 그러면 우리는 우선 물리적인 정지를 떠올리게 되니까, 1차원적인 느낌이 들어요. 하지만 도시가 빈다는 건, ‘도시가 자기정체성을 상실’하는 거죠. 그 정체성 상실의 상태를 정정주 작가의 작품이 감상자가 지각 가능한 상태로 만들어준다는 데 핵심이 있어요. 단순히 공포나 위기를 느낀다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 같아요. ‘기묘함’, ‘친숙한 것이 유발하는 낯선 두려움’, 이런 종류의 지각 상태를 도시를 모티브로 한 설치미술작품을 통해 경험하는다는 사실이 더 강조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우리가 일상을 사는 바로 그 도시의 숨겨진 위험 상태 같은 것이 예견의 형태로 작품 속에 떠오르니까요.
 
글 강수미
철학박사, 서울대학교 인문학 연구원 연구원이며, 대학에서 강의한다. 미학자이며 미술비평가로서 활동한다. 저서로 [서울생활의 발견], [한국미술의 원더풀 리얼리티] 등이 있으며, 발터 벤야민 미학에 대한 다수의 연구논문을 썼다. 독립기획자로서 ‘번역에 저항한다’ 전시를 기획해 2005년 ‘올해의 예술상’을 수상했다. 
 
이 글은 서울문화재단 월간지 <문화+서울> 2010년 1월호에 실린 Young Artist 2010 기사내용에서 발췌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