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eming of Seeming: 민성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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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view
신체(Body)는 인간 및 자연의 모든 요소들의 경험들이 재구조화된 유기체인 것이고 이것을 둘러싸고 있는 구조와 환경적 영향은 이 대상 위에 덮여서 위장되어 지거나 장식 되어져 있는 가면과 유사한 외양 으로서의 외양이라고 생각된다. 본질은 항상 본성적 이념을 가지고 고정된 질서를 가진 외면적 신체 내면에 존재하는 파편들의 연결체인 기관들(Organ)의 구성 이라는 생각을 하며 이것이 사회를 규정하는 주체라고 말할 수 있다.
여러 장소에서 수집된 사물들을 구조적으로 연결한 18개의 매개 체들은 유기적인 조직과 유동적 풍경(상황)을 은유적으로 형상화 하였다. 오브제를 둘러싸고 있는 얇은 막은 장식적인 내부를 온전 히 가리거나 흐릿하게 만드는데, 살갗처럼 외부와 내부를 연결하 는 예민한 조직과 동일하다. 또한, 연극적인 상황적 연출은 일시 적이며, 파편화된 개인의 모습들을 서로 바라보며 다시 인식하고 수용하는 과정을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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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d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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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ss Release Text자 : 권태현제목 : 꿰어내려면 구멍을 뚫어야 한다.민성홍은 꿰어낸다. 누군가 쓰다 길에 내어놓은 가구를 해체하여 다른 사물들과 연결하거나, 버려진 그림을 접어 꿰매는 등 그의 작업은 무언가 꿰어내는 경우가 많다. 꿰어내기는 기본적으로 무언가를 연결하는 일이다. 특히 어떤 것을 그냥 접붙이지 않고, 구멍을 뚫어 엮어내는 것을 꿰어낸다고 한다. 구슬을 꿸 때에도, 실로 꿰맬 때도, 스테이플러를 쓸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꿰어내기는 원래의 사물을 그대로 두지 못한다. 그것은 물질을 손상시킨다. 연결에 앞서 훼손한다. 매끈한 표면에 구멍을 내어 안과 밖, 내재된 것과 표상된 것을 명확히 구분하던 막을 찢는다. 그렇게 구멍을 뚫어야만 비로소 무언가 꿰어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버려진 장식용 산수화를 차곡차곡 접어 만든 <가변성을 위한 연습>연작에는 얄따란 실이 곳곳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프레임 바깥까지 늘어진 실밥을 눈으로 쫓다 보면 그림의 접혀 올라온 부분 안쪽으로 꿰맨 자국이 보인다. 바늘구멍에서 얼기설기 흘러나와 있는 실들 때문인지 그 작업은 이미지의 구성만큼이나 작업의 물질적 상태가 도드라진다. 그림을 종으로, 횡으로, 혹은 대각선으로 접어 만들어진 주름. 이미지에 물질적으로 깊이를 부여하고, 평평한 것에 정면과 측면을 동시에 만들고 있는 주름. 그 주름은 다양한 의미에서 작업을 입체적으로 작동시킨다.주름은 그 작업을 보는 이를 움직이게 만들기도 한다. <가변성을 위한 연습>을 정면에서 얼핏 보면 그림이 접혀서 보이지 않는 부분이 상당함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그 이미지가 산수화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미지를 보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산수화라는 스키마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믿고 있는 대로 대상을 보곤 한다. 그러나, 바늘구멍에서 튀어나온 실밥을 쫓아서, 굽이굽이 접힌 산수화의 표면을 따라서 작업에 가까이 다가가 살피다 보면, 그림 속 산세의 자연스러움은 접힌 부분들이 감각되며 산산이 깨져버린다.그렇게 관객들은 몸을 움직이거나 접힘의 깊이를 느끼면서 표면의 주름과 관계한다. 여기에서 주름을 통해 꿰어냄과 마찬가지로 안과 바깥의 문제를 다시 한번 생각해볼 수 있다. 물론, 주름(pli)이라는 들뢰즈의 개념을 경유하여 그런 문제에 더욱 입체적으로 다가가는 것도 가능하다. 들뢰즈의 다양한 저서에서 여러 가지 방식으로 변주되는 주름이라는 개념은, 그의 존재론적 사유의 핵심적인 알레고리이다. 들뢰즈가 잠재성과 현행성의 역동을 주름에 비유하기 때문이다. 주름에서 펼침의 가능성을 감각하는 것, 혹은 펼쳐짐과 함께 있는 주름을 발견하는 것. 이렇게 복잡한 개념을 검토하지 않더라도, 눈앞에 보이는 주름에서 우리는 한쪽의 접힘이 또 다른 쪽의 펼침이 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접힘은 펼침을, 반대로 펼쳐져 있는 것은 접혀 있음을 머금는다.이러한 관념에서 바깥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안쪽을 구성하는 주름의 운동이 된다. 주름은 그렇게 내부성과 외부성을 동시에 생성한다. 한편, <가변성을 위한 연습>에서 외부와 내부의 문제는 주름 뿐만 아니라, 민성홍이 주워 온 산수화 위에 손수 그려 넣은 또 하나의 요소를 통해서도 다루어진다. 그는 산수화에 볼펜으로 수평, 수직, 대각선의 그물망을 올려놓았다. 이런 그물망 형태는 민성홍의 작업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형식이기도 하다. 비평가 김홍기가 민성홍의 또 다른 작업 <연속된 울타리>와 연결하여 “자기모순적 울타리”라고 썼던, 안과 바깥을 모호하게 만드는 망이 여기 다시 등장한다. 막혀 있지만 사실 그것을 통해 건너편을 볼 수 있는, 뚫려 있지만 그 표면의 경계를 인식시키는 불투명의 가시성을 가지는 망. 그것은 마치 방충망처럼 차단하면서 동시에 열기 위한 장치이다. 또한 관점을 살짝만 바꾸면 그 망에서 얇은 선들이 엮이며 만들어내는 작은 구멍들의 다발을 발견할 수 있기도 하다.이런 그물망, 즉 그리드는 로잘린드 크라우스가 모더니즘과 관련하여 탁월하게 짚어내듯, 어떤 위계나 중심, 굴곡을 갖지 않기에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는 순수한 무관심성과 절대적 무목적성의 표상으로 여겨지곤 한다. (그렇기에 미술의 자율성과 같은 모더니즘적 지향과 연결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드는 아무것도 나타내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리드는 자기가 재현하려는 동일한 표면 위에 구획된, 바로 그 표면의 재현이기 때문이다. 민성홍은 이미지의 표면에 망을 씌워 그것에 가시성을 부여한 뒤에 물질적으로 그 표면을 접어 올린다. 여기에서 또하나의 중요한 문제는 민성홍이 다루는 이미지가 동양화풍의 산수화라는 점에 있다. 동양의 산수화는 (진경산수의 경우에는 조금 다르지만) 이상적으로 여겨지는 관념적 대상을 반복적으로 재현한다. 허공에서 풍경을 발견하는 근대적 주체라는 개념과 연결된 서양의 풍경화와 전혀 다른 시각 체제에 속하는 이미지인 것이다. 이런 조형 방법론을 통해 민성홍은 서로 다른 시각 체제에 속한 것들이 서로에게 구멍을 내며 복잡하게 꿰어지는 표면을 창출해낸다.이렇게 서로 다른 것이 뒤엉키는 문제는 표면에 겹쳐 있는 다른 시각 체제들에 머물지 않는다. 그림의 모서리에는 저자를 표시하는 도장들이 겹쳐 찍혀 있다. 그는 주워 온 그림에 자신의 이름을 새긴 전형적인 동양화 직인을 찍어 놓았다. 그렇게 여러 개의 직인들이 서로 꿰어지며 저자성의 경계에도 작은 구멍을 내는 것이다. 또한 <가변성을 위한 연습>연작은 원래 나무로 된 프레임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최근 전시에는 프레임이 생겼지만, 초기의 설치 형식을 살펴보면 프레임 없이 벽에 붙여졌고, 그런 설치를 통해 상이한 풍경을 담은 작업들이 이리저리 연결되면서 전혀 다른 스케일의 또 하나의 풍경을 만들어내기도 했다.민성홍의 작업에서 다른 체제에 속한 사물들을 뒤섞는 것은 <가변성을 위한 연습> 연작뿐만이 아니다. 그는 수시로 주변의 버려진 사물들을 그러모아 구슬처럼 꿰어내는 <다시락>연작을 지속하고 있다. 또한 그런 형태의 조각적 구성에서 파생된 <skin_layer>연작은 입체적인 조형물에 섬유나 비닐로 만든 망을 뒤집어씌운다. 군사용 위장막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 망은, 평면에 구멍을 내어 안쪽에서는 바깥쪽을 볼 수 있고, 바깥에서도 안쪽의 사물을 파악할 수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런 형식은 앞서 이야기한 꿰어냄과 주름, 그리드 등에서 다루어진 문제와 다시 한번 꿰어진다. 또한 <skin_layer>의 위장막은 이전에 마치 낙하산과 같은 형태로 제시되었던 풍경화 작업에 구멍을 뚫어 다시 내보인 것이다. 이런 민성홍의 방법론은 자신의 다른 작업들을 개념적으로, 또 물질적으로 꿰어내기도 한다.다양한 형식으로 변주되고 있는 장식용 풍경화를 전유하는 작업 중 <윈도우>는 지금의 논의와 흥미롭게 엮이는 지점을 가지고 있다. 민성홍은 그 작업에서 풍경화를 찢은 뒤에 그 경계를 실로 꿰매거나 스테이플러로 고정해 놓았다. 찢어진 풍경화 사이로 평면의 지지체인 흰색 면이 드러난다. 그런 균열은 이미지를 작동시키는 체제의 외부, 그것을 지탱하는 물질적 지지체의 구조를 가시화한다. 여기에서 실이나 스테이플러가 찢어진 살갗을 봉합하는 용도로 쓰인다는 점을 생각해볼 수도 있다. 찢어지면 그것이 감싸고 있는 존재가 죽어버릴 수도 있는 살갗. 지지체를 드러내 보이는 평면 작업의 틈새는 내장이 흘러나오는 치명적인 상처를 연상시킨다. 물론 찢어진 살갗은 잘 봉합되어 있으니 그 틈새에는 곧 살이 차올라 흉터가 될 것이다. 균열을, 상처를, 외부를 그대로 내부로 받아들이는 표면이 여기에 있다.민성홍은 이렇게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한 것들을 계속 꿰어낸다. 안과 바깥을 동시에 드러내는 표면, 살, 막, 망, 그리고 그것들을 꿰어내는 운동까지. 서로를 꿰어내는 그의 작업에서 주체와 객체를 구분하고, 내부와 외부를 구분하는 경계는 앞뒤 구분이 없어져 버린다. 나아가 그런 작업들은 하나의 작업뿐만 아니라, 아예 다른 물질이나 관객, 심지어 작업 외부의 세계와도 꿰어진다. 다시 한번, 꿰어내려면 구멍을 뚫어야 한다. 그것들은 세계에도 작은 구멍을 먼저 뚫을 것이다.퍼블릭아트, 2022년 7월: p.124, 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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