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esire to be desired: 강주리

27 November - 15 December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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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ss release

지금, 여기 그리고 펜으로 만들어낸 우리의 이야기

신보슬

                                                                      

- 그림
스스슥, 사사삭.
강주리의 그림을 보고 있자면, 이런 소리가 들린다.
종이 위에 볼펜으로 스스슥 선을 그어 가면
어느덧 나비와 잠자리, 화사한 꽃들과 동물이 화면에 가득해 진다.
한 걸음. 숨죽여 그림 앞으로 다가가 본다.
왠지 어수선한 소리를 내면, 나비가 날아갈 것 같아 괜시리 조심스러워진다.
메뚜기인 듯 여치인 듯 보이는 녀석은 훌쩍 그림 뒤로 도망갈 것만 같다.
검정, 파랑, 빨강. 단색으로만 그렸는데,
동물은 생생하고 꽃들은 화사하다.
 
누가 봐도 강주리의 그림은 ‘정물화'다.
꽃과 동물과 곤충이 가득한 정물화
그래서 강주리의 작업은 다가서기가 쉽다.
여느 집 거실에 있어도 잘 어울릴 것 같은 예쁜 그림처럼 보인다.
심지어 아주 장식적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지금 이 시대에 왜 정물화인가.
 
하지만, 강주리의 그림은 그저 예쁜 그림만은 아니다. 그림 속에는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그래서 그/녀의 그림은 보는 그림이기보다 ‘읽는 그림’에 가깝다. 마치 그 옛날 네덜란드의 정물화가 단순히 꽃그림이 아니었듯이.
 
17세기 스페인으로 독립한 네덜란드는 전례 없는 부흥기를 맞는다. 경제가 급성장했고, 중산층이라 불릴 수 있는 부르주아 층들이 생겨난다. 여기에 종교개혁을 부르짖었던 칼뱅주의에 의해서 성상을 우상숭배로 여겨 금지하는 경향까지 더해져 교회나 수도원, 궁정사회에서 그림을 주문하는 일이 줄어들었다. 그 빈자리를 차지한 것이 부르주아와 일반 시민들이었으며, 그들은 각종 진귀한 보물들을 정물화 안에 그려 넣으면서도 금욕적인 생활과 신앙심을 드러내고 싶어 했다. 그렇게 네덜란드에서 정물화가 인기를 얻게 되었다. 겉으로는 해외 무역에서 들여온 값비싼 과일, 음식, 화려한 꽃과 사치품들이 대단히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물질적인 풍요로움과 아름다움을 과시하지만, 그러면서도 검소함을 강조했던 칼뱅주의에 어긋나지 않도록 부와 금욕을 동시에 담을 수 있는 그림, 네덜란드 정물화는 그런 것이었다. 네덜란드 정물화를 설명할 때 자주 등장하는 ‘바니타스’ 즉, 지상의 모든 것은 덧없고 헛되다는 의미가 담겨 있기도 했다. 그래서 네덜란드 정물화는 보는 그림이 아닌 정물 하나하나의 의미와 배치, 내용을 읽어야 하는 그런 그림이었다. 강주리의 그림을 읽어야 하듯.
 
다시 강주리의 그림으로 돌아가, 그/녀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꽃과 나비도 그저 보기 좋게 펼쳐놓은 것이 아니다. 물론 네덜란드 정물화를 보는 방식으로 그/녀의 작업을 읽을 수는 없다. 그/녀의 그림에는 그 어떤 부와 아름다움에 대한 과시도 금욕적 생활에 대한 것도, 나아가 종교적인 그 어떤 경구도 없다. 하지만, 그/녀의 그림 역시 읽어야 하는 것들이 있다. 그림 속 동식물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처음 보았던 예쁜 그림과는 다른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유전자 변형이 된 동식물, 방사능에 노출되어 생겨난 돌연변이, 유기견/유기묘, 로드킬의 현장과 같이 편치만은 이야기가 가득하다. 상상의 동식물이 아닌 자연사박물관이나 과학 잡지, 뉴스, 인터넷 등에서 찾아낸 동시대의 자연, 인간과 자연의 관계, ‘현재’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것은 지금 우리의 이야기이다. 물론, 그렇다고 그 어떤 교훈이나 반성을 강요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오늘날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드러내고 그려 놓고서는 보는 이에게 질문한다. 넌 어때? 때문에, 강주리의 그림은 멀리서 보기보다 가까이 다가가 하나하나 찾아 읽어내며 질문에 답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 설치
강주리의 정물화가 읽는 그림이라면, 작가의 설치는 반대로 ‘보고 느끼는’ 설치이다. 그래서 볼펜 드로잉이라는 특유의 기법에서 이어지는 설치는 그림과는 참 많이 다르다. , 시리즈에서 보이듯, 작은 그림 조각 단편들이 모이고 합쳐져서 덩어리를 만든다. 그림 속 동식물들, 이미지의 단편들은 정물화에서와 마찬가지로 짤막짤막한 선으로 이루어진 볼펜 드로잉으로 기이한 생명체들을 그려내고 복사하고 다시 오리고 붙여가며 공간을 잠식해 들어간다. 공간을 마주해서 공간과 대면하며 풀어가는 좀 더 감각적이다. 그래서 일까. 작은 종이 조각에서 시작한 설치인데, 왠지 거대해진 덩어리가 꿈틀댈 것만 같다.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 레지던시, 그리고 프로타쥬라는 실험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에서의 그녀의 작업은 다소 당황스러울 정도로 바뀌었다. 버려진 플라스틱물건들을 종이에 두고 볼펜으로 긁어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어렸을 때 누구나 해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동전이나 나뭇잎, 철망같이 울퉁불퉁한 면 위에 종이를 덮고 연필이나 크레파스로 중이를 문질러 모양을 만드는 방법, 프로타쥬. 강주리는 최근 그 프로타쥬 기법을 가져와 작업을 했다. 확실히 달라졌다. 그동안 그/녀의 작업에 자주 등장했던 기형적인 동식물도 자연에 대한 언급도 없다. 이전 작업과의 공통점이라면 여전히 종이와 볼펜을 사용한다는 것 뿐.
 
그러나 사실, 강주리의 프로타주는 어느 날 갑자기 나온 방법은 아니다. 2015년 미국에서 레지던시를 할 기회가 있었다고 한다. 윌라파 베이 레지던시(Willapa Bay AiR)를 한 적이 있었다. 굴을 캐서 생업을 하는 사람들이 주로 사는 외딴 만이었는데, 당시 마치 추억을 간직하기 위해 조개를 주워오듯 그/녀는 매일 바닷가에 나가 쓰레기를 주웠다고 했다. 아마도 그/녀의 작업이 동식물을 주제로 하다보니 바닷가에 떠내려 오는 쓰레기에 자연스레 관심이 갔었나 보다. 그렇게 시간을 흘렀고, 레지던시를 마칠 무렵, 그동안 모았던 쓰레기를 모두 가져올 수 없었기에, 프로타쥬를 시도했단다. 그런 경우라면 대게는 사진을 찍던가 아니면 그림을 그려도 될 것을 왜 하필 프로타쥬였을까. 짐작컨대 사진과 그림은 매체를 거쳐서 제작되지만, 프로타쥬는 물건과 직접 대면해야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 후, 플라스틱이나 해양쓰레기에 관한 이야기들. 그래서 맥주캔 홀더에 몸이 낀 거북이나 철사에 목이낀 물개들을 그리기도 했지만, 아마도 좀 더 직접적인 표면에 더 관심이 갔던 것 같다. 청주에서 레지던시를 하며, 그/녀는 다시 프로타쥬를 가져왔다. 해양쓰레기는 아니지만, 플라스틱들을 모아서 새것처럼 깨끗이 씻은 후 열을 가해 일부러 어그러트리기도 하고, 더 단단하거나 반짝거리게 만든 플라스틱들을 프로타쥬로 다시 담아내었다. 담는다는 것은 맞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 흔적을 안았다고나 할까. 그리고는 공들인 그림들 위에 플라스틱 병을 올려 설치를 했다. 어떤 드로잉인지 보기 어렵게. 마치 보일 듯 보이지 않는 당시 그/녀가 자연에 대해 느꼈던 것 같은 감정을 닮도록.
 
레지던시는 그런 곳인지도 모르겠다. 늘 비슷한 작업을 하는 작가가 조금은 삐딱선을 타도 용서되는 시간과 공간. 늘 같은 곳을 보다가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릴 수 있는 틈. 강주리 작업에 등장한 프로타쥬는 아직 실험단계이다. 아직, 그 완성이 어디가 될지, 언제가 될지는 모르는 실험.
 
 
- 노동
그림이건 설치건. 그/녀의 작업의 시작은 종이와 볼펜이다. 일상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재료인 볼펜으로 그린 작은 선들의 집합체. 어깨가 뻐근해 지고, 눈이 침침해진다. 노동집약적. 그/녀는 자신의 작업을 이렇게 부른다.
 
그녀가 그림을 그리며 움직이는 반경은 확실히 일반적인 화가들의 모습과 다르다. 커다란 캔버스를 세워 놓고, 크게 붓질을 하고는 뒤로 물러서 바라볼 수 있는 동선이 없다. 그림 앞에 앉아 볼펜의 가느다란 선들을 모으고 쌓아서 이미지를 ‘구축’해 간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에게 드로잉을 맡길 수도 없다. 그렇게 하염없이 그려낸다. 꾀를 피울 수도, 대강 넘어갈 수도 없다.
 
그림만 노동집약적인 것이 아니다. 설치도 마찬가지다. 손바닥만 한 종이 드로잉들을 수 백 개, 수 천 개 복사하고, 오리고, 붙여서 공간에 펼쳐놓는다. 공간을 커졌지만, 여전히 하나하나 붙이는 수작업이 남았다. 여전히 노동이 필요하다. 설치에서 그/녀의 노동은 대체로 단발적이다. 공간과 함께 숨 쉬며 만들어가야 하기에, 공간이 변화하면 설치의 형태도 변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녀의 노동은 단발적이지만 무한 반복적이기도 하다. 마치 끝임 없이 바위를 밀어 올려야만 형벌을 받은 시지푸스처럼. 설치의 노동은 매번 새로이 반복된다.
 
하지만, 그녀에게 이런 노동집약적인 작업은 시지푸스의 형벌과는 다르다. 그/녀의 노동집약적 작업과정은 세상을 이해하고 소통하게 해주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일상적인 도구인 종이와 펜을 사용하여 유연하게 세상을 마주하는 방법, 그/녀에게 작업노동은 그런 것이다.
 
- 그/녀에게 예술이란
궁금해졌다. 강주리라는 작가에게 ‘예술’이란 무엇일까. 물론 사람들마다 예술에 대한 생각은 다르다. 어떤 이에게는 위안을, 어떤 이에게는 각성을, 어떤 이에게는 감동을 주는 것이 예술이다. 예상했듯 그/녀에게 예술은 그저 아름다운 풍경이나 정물이 아니다. 그/녀에게 예술이란 삶과 현실의 변화를 반영해야 하는 것이다. 전시장에 걸려있는 죽어 있는 작품이기 보다는 끊임없이 현재와 소통하고, 세상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창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작가가 나이를 먹어가고, 세상이 변해가는 것을 보면서 작업도 바뀌어간다. 때론 의아하기도 하고, 예상을 벗어나기도 하지만, 그 역시 강주리라는 작가가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이다. 작가 강주리가 세상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펼쳐 보이는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