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 cabin romance: 김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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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나는 사람들을 드로잉한다. ‘수행적 드로잉’(performative drawing)이라고 부를 수 있을 그의 작품들은 아주 작은 크기(A4 사이즈 정도)에서 3-4m 폭에 이르는 대형 드로잉들까지 다양한 공간 속에 일련의 일기(日記)처럼 보이는 텍스트들과 혹은 텍스트가 그림 안에 자리 잡으면서 함께 독해의 대상이 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글과 그림이 함께 제시되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지만, 김혜나의 작품들에서 이 두 개의 항은, 거칠게 규정하자면, ‘고백’과 그것의 밝혀지지 않은 현장, 혹은 ‘무대’로 제시된다. 그의 작품은 단적인 감상주의와, 그것만으로는 모두 설명할 수 없는 형식적 특이성 사이를 오간다. 그녀의 소묘들은 그녀 자신이 언급한 작가인 ‘레온 골럽’의 작품에서처럼 비범한 고통과 그로 인한 정신적 소멸의 경험으로부터 ‘분열적 인물화’라고 부를 수 있을 군상(群像)과 그들이 놓인 풍경의 기술(記述)을 표현적 대상의 범위로 한다.
김혜나의 그림들 속에는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지만 이들은 대체로 다소 비슷비슷한, 단순화된 모습으로 그려져 있으며 넓은 색면으로, 혹은 패턴들로 구획된 공간 속에서 각자 자신의 에피소드들에 몰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림들은 대체로 지평선을 연상시키는 수평선에 의해 구획되어 있으며 사람들은 복합한 지층의 유동적 흐름 위에 자리잡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좀 더 일찍 그려진 드로잉들 속에서 이 선은 단순한 수평의 제스츄얼한 획(劃)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피터 도이그(Peter Doig)의 회화에서처럼 인물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지표 아래쪽에 존재하는 것 같은, 대지의 바깥이 아닌 내부에 갇혀있는 듯한 모습으로 보인다. 많은 인물들이 자화상 혹은 자신이 잘 아는 인물, 혹은 그 인물에 투사한 자신의 감정들을 표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며 그들은 때로는 가면처럼, 때로는 커다랗게 부풀어 오른 붉고 핏발선 ‘대-자아’(alter-ego)로 제시되고 있다.
김혜나의 작품에 대해 말할 때, ‘-처럼 보인다’ 라는 표현을 자주 쓰게 되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본다. 그의 작품 속에서 인물들은 모두 눈동자가 없는 가면이나 탈-인격적 대상들로 그려져 있다. 이들이 갖고 있는 유일한 존재론적 단위는 ‘윤곽’들이며 오로지 그것에 의해 둘러져 있는 공간만이 그 실재(reality)가 된다. 얕은 윤곽 안에는 모호하고 흐릿한 음영들이 표시되어 있으며 이 음영들은 지층의 그것들과 서로 뒤섞이거나 삼투(滲透)하고 있다. 공간과 인물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필연적 침투는 그녀의 드로잉 속에 나타나는 인물들이 투사의 대상이 아니라 일련의 알 수 없는 자연물들, 풍경 속에서 돋아나는 버섯 같은, 각각 독립적인 향과 색채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의 의미에 대해서는 어떤 주관적인 동조(sympathy)도 불가능한 대상들이라는 점을 강조해 준다.
그의 작업에서 연상되는 것은 레이몽 페티봉(Raymond Pettibon)처럼 자발적으로 찢어낸 종이조각들로 이루어진 커다란 스케일의 드로잉 설치작업이 있다. 특히 인물의 뒷모습을 강조한 드로잉들에서는 장-샤를르 블레(Jean-Charles Blais)를 연상시키는 점들이 없지 않다. 이것과 관련해서 말하자면, 그의 드로잉들 가운데 매우 독특한 작업인 은 작업의 앞면과 뒷면에 대한 생각을 이끌어내고 있다. 그의 인물들은 모두 앞에서 보아 알 수 없는 존재들인 반면, 뒷모습을 보이는 인물의 경우에는 즉각적으로 동조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작가는 그 인물의 아픔을 표시하기 위해 총상을 기재해 넣고 있다.
김혜나에 대해 생각하면서 떠오르는 것은, 특히 독일 표현주의 계열의 드로잉으로 대표되는 주관적이고 관념적인 드로잉의 스타일과 관련하여 생각나는 것은, 드로잉은 결코 직관적, 표현적 혹은 신체적 기록만으로 더 이상의 ‘차이’, 혹은 ‘특이성’을 생산해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최소한 해석학적 수준에서의 형식적 계열성이 필요하다. 다소 현학적인 표현이 되어버렸다. 쉽게 말하자면 상징적인 서사들로 채워져 있는, 감상적 선묘들로 나열되어 있는 드로잉은 그 다음 단계의 형식적 수준인 작가 자신이 구축하고 있는 세계의 구조에 대한 일관된 지시(index)들을 내포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당연히 그 세계가 존재하고 있어야 한다. 아주 미세한 차이지만 부정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김혜나의 재능은 분명해 보인다. 그의 드로잉 중 어떤 것들은 놀라운, 그러나 통제된 복잡성을 드러낸다. 이제 그의 생각들 속에 실제로 그런 세계가 들어서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