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1.
안녕하세요. 우선, 이번 갤러리조선에서 열린 《림파 림파》 전시의 경우, 지하를 가득 메운 회화 설치 작업이 인상적으로 다가옵니다. 이 작업이 인상적인 이유는 두 가지인데, 먼저, 작가님의 이전 전시와 달리, 보다 회화를 공간으로 확장하고자 한 의도가 보이며, 이전 작품과 달리, 회화 표면에서 작가의 의도, 개입보다 물질이 서로 반응해가며 만들어가는 표면 쪽에 보다 무게가 실린 것 같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저항 끝에 다다르는 투명함〉이나, 〈중심으로부터〉와 같은 작업의 경우, 작가의 구성, 직물과 화면을 배치하고자 한 의도가 보이는 반면, 이번 회화 설치 작업의 경우, 그 의도가 덜 개입된 것처럼 보입니다.
작가노트의 “초기 작업이 자신과 환경의 관계를 홀로 마주하고 표현한 것이었다면, 점점 타인의 몸, 인간 외 생명체, 이 모든 것을 연결하고 있는 공간과의 관계를 인식하고 대면하는 것으로 관심사가 옮겨지고 있다”는 설명이 이번 전시를 통해 분명해지는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해 좀 더 설명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A1
저는 회화를 이루는 기본 구조를 표면과 지지대로 보고, 이를 중심으로 다양한 회화적 실험을 전개해 왔습니다. 지하 갤러리의 메인 작업인 <500만년만에 펼쳐진 몸>은 갤러리 공간 구조를 지지대 삼아 회화의 표면이 자리를 잡아가며 3차원으로 확장된 설치로 구현되었습니다. 프레임 작업과 더불어 발전시켜 온 설치는 2018년 <적응과 회피의 메들리- color you can eat and sweat>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요, 이때부터 시각과 촉각이 합쳐진 ‘촉지적’ 경험을 일으키는 작업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다양한 장소에서 크고 작은 설치 작업을 보여왔는데, 이번 개인전에서는 규모를 키워 공간 전체를 ‘회화의 장’으로 확장시키는 의도를 가지고 작업을 구성하였습니다. 특히 관람자가 작업속을 거닐며 몸의 감각으로 경험하도록 마치 촘촘한 미로처럼 동선을 디자인했어요. 처음으로 전시장 모델도 만들며 꽤 오랜 시간 고민하고 계획하여 준비했습니다. 지하 전시장 천장에 못을 박지 못하는 조건이어서, 벽에 설치할 스테인리스 스틸 손잡이를 개조한 구조를 고안해내는 과정도 새로운 도전이었습니다. <변형과 독과 시>의 경우, 관람자가 완전히 회화의 표면 속에 둘러싸여 ‘녹아드는’ 경험을 상상하며 텐트 같은 형태로 만들게 되었어요.
설치 작업의 바탕을 이루는 유연한 천(표면)은 주로 다양한 수성 재료- 아크릴, 잉크, 천연/인공 염료 등으로 색이 입혀집니다. 저에게 염색하는 행위는 붓이나 다른 매개없이 직접적으로 물질을 다루고, 머리에서 벗어나 몸의 감각과 움직임에 집중하는 과정입니다. 또한 물의 작용을 통해 색이 천에 스며 들고 무늬와 흔적들 이 자연스럽게 펼쳐지도록 내맡김의 시간, 주체를 내려놓는 행위가 중요해요. 천, 염료, 물의 작용으로 생겨 난 무늬와 흔적들은 그저 우연이라기엔 너무나 정묘하고 때론 원시적인 느낌마저 들게 하는데, 거시적 혹은 미시적으로 바라본 생명체와 자연의 신비로운 자기조직화 작용을 떠올리게 합니다. 작업의 주요 재료인 멀베리(뽕나무잎), 아크릴, 락스(탈색 작용)는 각각 천연, 인공, 독성 성분을 내포하고, 삶의 환경에서 피부로, 호흡기로, 소화기로 들어오는 흔한 구성 요소들을 소환합니다. 물질들은 세포와 반응하고 변형되어 다시 배출되는 과정에서 우리 몸과 구분이 사라집니다. 이런 과정을 떠올리며 물질 세계와 연결되어 있는 감각적 느낌을 일깨우고, 완성된 작업의 표면이 마치 자신의 피부의 연장선인 듯 상상해 보게 하고 싶어요. 거대하지만 부드러운 작업을 마주하면 그 순간만큼은 몸의 한계- 크기, 부피, 시간-을 넘어서고 공간과의 접촉면을 넓힐 수 있다 생각합니다. 이를 통해 관람자 또한 자신이 마주한 물질과 환경에 깨어나 상호연결성을 느끼고, 공동의 장 속에서 확장된 주체를 경험하게 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습니다.
Q2
시대마다, 작가마다 회화를 다른 방식으로 규정해왔습니다. 가장 대표적으로 그린버그의 ‘평면성’ 같은 사례가 있습니다. 요즈음은 회화에 관한 탐구를 내적으로 규정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회화 표면 바깥으로 확장하고, 관계 맺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네트워크’란 단어가 현대 미술 실천의 많은 것을 설명한다고 생각합니다.
허나, 정말로 모든 것을 담아내는 회화는 없을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작가 고유의 어법, 세계관, 이야기 등이 생겨나는 것 같습니다. 무엇과 관계 맺고, 어느 방향으로 확장해 나가는지에 따라 작가마다 풀어내는 이야기가 다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작가님은 날씨와 계절처럼 피부, 신체를 통해 촉각적으로 감각하게 되는 ‘환경’을 탐구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작가님이 다루시는 ‘환경’은 어떤 식으로 확장해 나가셨나요?
A2
처음 <날씨 회화>를 시작했을 때, 개인적인 몸의 예민함, 아토피, 냉난방 시설이 없는 작업실, 그리고 너무나 강렬한 한국의 여름과 겨울의 경험이 중요한 출발점이 되었어요. 오랜 시간 요가나 명상을 수련하면서 현재에 깨어 있기 위해 몸의 감각에 집중하는 것이 습관화 되어있었기 때문에, 그 방향성이 자연스럽게 작업에서 드러나게 되었던 것 같아요. 캔버스나 천 등이 마치 피부처럼 느껴지고 환경을 마주하는 몸의 감각을 기록하는 표면으로 다루게 되었어요. 몇 차례의 계절이 지나며 <Sun Drawing>, <물과 철>, <하드보일드 티>등의 시리즈를 전개하는 과정에서, 점점 더 전통적인 캔버스 회화 프레임에서 벗어나 ‘표면과 지지대’ 구조 안에서 자유롭게 다양한 재료와 방식으로 실험하게 되었습니다. 4번의 레지던시 경험을 통해서 작업 환경이 바뀔 때 마다 그 조건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새로운 시작점으로 삼기도 했어요. 초기에는 현대 예술에서 회화가 살아남기 위해 프레임 속 이상향에만 갇혀 있기보다 삶과 함께 변화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던 것 같아요. 2019년 금천예술공장에 입주했을 당시, 근처 방직 공장에서 폐기되는 옷감을 얻을 수 있었어요. 날씨와 계절에 관련된 작업이 충분히 전개되고 전환점이 필요한 시기였는데 이 후 재료적으로 더 확장되고, 염색한 천을 이용한 공간적 설치를 발전시키게 되었습니다. 특히 옷와 관련된 천을 다루며 신체성, 나 이외 다른 존재의 몸들, 공간 속에서 몸의 경험이 작업에서 중요한 부분이고 앞으로 더 주목해야 할 방향이라는 자각이 생겼습니다. 제 작업은 ‘회화’라는 오래된 매체에 대한 애정과, 삶의 여정에서 마주한 환경과 경험 사이에서 만들어져 왔다고 생각해요. 앞으로 예상치 못한 만남들이 불러올 변화 또한 기대하고 있습니다.
Q2-1
최근에는 한발짝 더 나아가, 《림파 림파》 전시의 경우, ‘환경’을 생산하신 것으로도 보입니다. 작가님은 작업을 통해 어떤 ‘환경’을 생산하고자 하셨나요?
A2-1
1의 답변에 어느정도 설명이 들어있다고 생각하는데요, 규모가 있는 설치였기 때문에 작업실에서 상상하고 의도했던 것과 달리, 전시장에 직접 구현된 작업 속에서 사람들의 반응 속에서 깨달은 것들이 많았습니다. 어느 작가님의 “탐욕스럽지 않게 거대하고 다채로운 색과 면의 회화 또는 건축” 이라는 피드백이 특히 기억에 남아요. 부드럽고 투명한, 피부에 닿을 듯한 물의 흔적들 속에서 즉각적으로 몸의 감각에 깨어나고 현재의 순간을 마주할 수 있는 환경이길 바랬습니다. <변형과 독과 시>안에서 두 번에 걸쳐 진행한 소규모 명상 워크숍 <녹아들기(Melting)>도 귀중한 경험이었어요. 함께 현재에 머물고, <500만년 만에 펼쳐진 몸>사이를 침묵 속에 걸으며 몸과 연결된 공간, 회화 그리고 물질에 대한 내밀한 경험들을 이야기 나누었습니다. 작업이 만든 환경 안에서 사람들과 깊이 교감할 수 있었던 특별한 시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