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형점: 조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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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이중적 조건
조은정의 '균형점' 전은 의식과 무의식, 현실과 환상, 이성과 욕망, 주체와 타자 사이의 경계 위에 구축된다. 통상적으로 균형이라 함은 대조군들 사이의 균형을 말한다. 균형은 경계 위에서 일어난다. 작가는 색감의 조정을 통해 어느 영역이라고도 할 수 없는 미지의 장소를 표시한다. 그림들은 엷게 바랜 듯한 무채색 색감에 고요한 정지감과 신비가 특징이다. 보통 꿈이 흑백임을 생각한다면, 다소간 비현실적인 공기에 잠겨있는 조은정의 그림은 꿈같은 풍경이다. 예술이라는 창을 통해서 누군가의 꿈을 볼 수 있는 것은 흥미롭다. 조은정의 작품에서 예술의 창을 통해 보이는 '세계'란 비가시적인 세계를 포함한다. 작품은 보이는 것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구상성이 유지되는 조은정의 작품에서 보이는 것의 비중은 크다. 미셀 푸코의 저서 『말과 사물』에 대해 푸코와 편지를 주고받았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의 화가는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보다 더 중요시 돼야할 이유는 없다'(르네 마그리트)고 말한 바 있다.
자주 등장하는 고풍스러운 건축에 달린 문이나 창문은 그 안팎을 드나들 수 있는 통로다. 여러 관계 중 타자와의 소통의 문제가 당면 과제인 작가에게, 통로는 여러 상황의 연출을 통해 소통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작품 「섬」에서 섬처럼 떠있는 집에 문이 없으며, 작품 「완전무결한 방어」에서는 문을 열었는데 벽이 나오는 등, 소통의 통로가 원활치 않음을 은유한다. 이전 작품에서 목조 건축에 붙은 종이 문을 표현한 「종이 문」(2014)이나 건물 모퉁이에 쪼그라든 문이 놓여있는 작품 「강요된 모퉁이」(2014)도 그렇다. 항시적인 온라인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등, 소통에 관한한 엄청난 기계들이 발달된 현대의 역설이다. 반대로 작품 「블라인드 문」에서는 석조 건물에 어울리지 않은 블라인드 문을 달아서, 과도한 소통에 대한 요구를 반영한다. 예술을 위한 예술이 있었던 것처럼, 소통을 위한 소통이 있는 것은 아닌지 묻게 될 정도로, 현대인은 소통에 대한 강박관념에 빠져있다.
실시간 자기 전시라고 할 만큼 광란적인 '소통'의 시대에, 예술은 비슷한 과제를 어떤 방식으로 수행할 수 있는가. 조은정의 작품은 그 어법이 상징적이기 때문에 현대사회에서 가장 일반적인 소통, 가령 광고가 겨냥하는 바의 즉시적 방식과는 거리가 있다. 거기에는 소통으로 완전히 환원될 수 없는 잔여물이 있으며, 이 잔여물은 또 다른 소통을 향한다. 예술적 소통은 신호나 기호와 달리, 다양한 방향을 가진다. 조은정의 작품이 닿아있는 초현실주의가 현실을 확장시키고 그 확장된 현실을 작품에 담기 위하여, 다의적인 상징을 사용한 것과 마찬가지다. 이러한 상징주의에서 '생이란 해독되기를 기다리는 암호문'(앙드레 브르통)으로 간주된다. 질베르 뒤랑은 『상징적 상상력』에서, 상징이란 단어는 희랍어 'symballein'에서 유래한다고 하면서, 그것은 구체적이고 육체적인 부분과 영적 질서의 실재를 연결한다고 본다. 인간은 상징을 통하여 자신의 특수성을 벗어나 보편성에로 자신을 열어젖힌다. 이러한 맥락에서 상징에 관한 대표 이미지는 깨진 반쪽이다.
'균형점'전이 구사하는 상징주의는 깨진 나머지 반쪽을 찾으려는 움직임이 있다. 상징적 사유는 더 깊은 소통을 위해 소통의 투명성을 다소간 유예하기도 한다. 조은정의 작품에는 깨달음의 즐거움을 주면서도 볼수록(또는 생각할수록) 더욱 수수께끼 같은 면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을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의지는 있다. 그녀의 작품은 삽화처럼 보는 것 만큼이나 읽는 것에 호소한다. 보이는 것 외에 아무런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지 않다고 주장하는 현대예술도 분명히 있는 만큼, 그 또한 하나의 태도라고 볼 수 있다. 조은정의 작품에서 여기와 저기를 나누며 또 연결하는 (창)문은 균형점을 발견하기 위한 이상적인 장치다. 그리고 건축은 그러한 장치들을 자연스럽게 배치할 수 있는 가변적인 무대다. 이탈리아의 레지던시 경험이 반영되어 있는 유럽의 고건물들은 심리에 관한 한 '새롭다'할 문제는 없는 고래로부터의 보편적인 문제들이 상연되는 장이다.
이 통로들을 통해 경계를 넘나드는 작품들은 이미 균형을 이룬 상태이기 보다는, 균형을 향한 잠재적 움직임이 있다. 과도적인 단계 자체가 강조된 작품도 있다. 가령 자른 호박에서 시뻘건 과육과 함께 씨앗이 쏟아져 나오는 작품 「저장기억」이나 집을 삼키는 듯한 담쟁이 덩굴이 있는 작품 「불규칙한 숲 집」이 그렇다. 비체(abject)의 미학이 알려주듯, 여기와 저기 사이에 걸쳐 흘러내리는 애매한 것들은 역겨우면서도 매혹적이다. 여기에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갈등이 충돌하는' '그로테스크의 미학'(볼프강 카이저)이 있다. 또한 충돌이 충돌로 인지될 수 있는 친숙함이 요구되며, 이를 통해 '친숙함 속의 낯섦'(프로이트)이라는 '기괴함'이 있다. 균형이라는 키워드는 상상 가능한 대조군들을 전면적으로 호출한다. 이러한 호출은 도발하지만 그에 대한 명확한 해답은 작가의 과제가 아니다. '균형점' 전에서 균형은 출발이 아니라 목적이며, 작가의 활동은 그러한 목적을 위한 특별한 수단이다.
물론 조은정의 그림은 그러한 목적 달성과 상관없이 그자체로 향유할만한 지점들이 있다. 거기에는 명확한 시공을 알 수 없는 신비로운 광경, 또는 '오후의 햇빛이 주변의 모든 사물을 정지 시키는 듯한'(드 키리코) 현존의 순간이 있다. 우리는 자연의 법칙과 문명의 규칙이 위반되는 장면들을 아무런 위험 없이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사회 속 인간을 유지하게 하는 금기는 느슨해지고 이로부터 발생하는 에너지는 쾌감을 준다. 그러나 그 자체로 매혹적이면서 어떤 역할도 있다면 더욱 좋지 않을까. 그 역할은 단순히 일상의 장식을 넘어서, 일상의 변화, 즉 현실의 절박한 요구에 대해 해법을 말한다. 균형을 생각해온 작가에게 인간의 몸과 마음은 균형을 쟁취하기 위한 전쟁터라고 할 수 있다. 조은정의 그림은 이러한 움직임이 사건화 되는 무대이며, 무대연출자는 자신이다. 물론 무대 위에는 자신의 분신이라 할 만 한 상징들이 활약한다. 작가는 무대 위의 자신을 보면서, 균형으로 귀결되어야할 자신과 타자의 관계를 실험한다.
지상의 삶에 낮과 밤이 교차하듯, 상반되어 보이는 것들은 균형을 이루면 좋으련만, 각각은 저마다의 몫을 더 크게 하려 애쓴다. 마치 제로섬 게임처럼 의식의 몫이 커지면 무의식은 줄어들고, 그 반대도 성립된다. '균형점' 전은 구별되는 두 세력을 적대적으로 보지 않는다. 미술사적으로, 이질적인 것의 병치라는 사건을 통해 타자와의 변증법적 대화를 시도하는 작품들은 초현실주의에서 그 유래가 찾아진다. 초현실주의에 이론적 토대를 제시한 시인 앙드레 브르통은 '꿈과 현실이라는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상반되는 두 가지 상태가 향후에는 초현실이라는 일종의 절대적 현실 안에서 화합되리라'고 믿었다. 이 초현실주의 시인에게 현실이란 '생명과 죽음, 현실과 환상, 과거와 미래, 전달가능과 전달불능, 높이와 깊이가 모순으로 보이기를 그치는 마음의 어떤 지점'(브르통)이다. 초현실주의가 단명한 운동이었듯이 이상적 화합을 일어나지 않았다. 그것은 현재에도 여전히 과제로 남아있다.
조은정에게 균형에 대한 관심은 초기 작품부터 발견된다. 「서커스-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2009)을 보면, 무게가 다른 이질적인 것들이 수직으로 쌓여있다. 중력 및 무게 감각을 완전히 무시한 아슬아슬한 배열은 쌓여있는 것들을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하다. 가느다란 선인장 위에 병아리가 올라가 있는 작품 「꽃」(2009)은 균형 잡기가 단지 '그러면 좋을 것이다'를 넘어서 삶과 죽음을 오가는 절대 절명의 문제일 수 있음을 예시한다. 그러한 작품들은 긴장의 강도를 높이며, 때로 카타르시스를 야기한다.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는 이질적인 사물의 조합을 통해 이야기하는 방식은 이번 전시의 작품들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정의」와 「반복된 꿈」처럼, 두려움을 야기할 수 있는 거대한 동물과의 만남은 동물성으로 상징될 수 있는 의식 하부 세계와의 대면을 말한다. 여기에서 동물성은 긍정도 부정도 아니다. 특히 인간을 중심에 두는 사고가 문제시 된 이후, 동물성은 그 부정적 의미를 덜어냈다.
이러한 야성에 붙은 대표적인 명칭이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상찬되는 이질적 타자일 것이다. 조은정의 작품에는 상대(타자)에게 압도당하지 않고 상대와 눈높이를 마주하려는 노력이 있다. 작품 「놀이터」는 대면을 넘어서 국면 전환을 노린다. 거기에는 거대한 물고기가 연필깍기 기계를 통과하여 바위로 나온다는 다소간 섬뜩할 수도 있는 형질 변환이 있다. 현대의 작가 조은정에게 무의식은 저 깊숙한 곳에 있을 뿐 아니라, 기계 같은 현실의 사물에 붙어있다. 그것은 이것과 저것이 연결되어 작동하는 '기계적 무의식'(펠릭스 가타리)이다. 요동치는 무엇인가가 무덤덤한 덩어리로 변환하는 과정이 누군가에게는 심리적인 해결책일 수도 있을 것이다. 조은정의 작품에서 물이나 식물은 동물과 달리, 수평면을 향하는 물, 하늘을 향해 균형 잡힌 가지를 뻗는 지상에 뿌리내린 나무는 처음부터 균형이 내재한다. 물론 이러한 무기질적인 균형은 죽음을 연상시킬 수도 있다. 쾌락의 끝은 죽음--프로이트는 쾌락원리와 죽음본능의 관련성을 주장한 바 있다—일 수도 있다.
키 큰 나무끼리 어깨동무를 하는 듯한 이미지의 작품 「공존」, 그리고 거센 바람을 견디기 위해 서로 연결된 작은 나무들을 통해 어떤 균형점을 보여주는 작품 「확장된 균형」은 균형을 가능하게 하는 경쟁이나 개체의 자유를 포기해야 하는 부정적 면모 또한 감지된다. 나무가 등장하는 풍경들은 살아있는 나무를 위해 죽은(죽어야할) 나무들도 필요함을 보여준다. 가지 없는 나무를 뒤엎은 담쟁이들이 있는 작품 「틈」은 자연적 균형의 깨짐, 동시에 또 다른 균형의 이미지가 있다. 모노톤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검은' 풍선은 하늘을 향해야할 풍선이 마치 족쇄(ball & chain)같이 묵직해 보인다. 검은 풍선은 작품 「생각의 무게」에서는 떨어지는지 날아다니는지 알 수 없는 한 남자의 발목에 걸려있다. 무거운 물질은 강한 에너지를 가지기에(반대로 가벼움의 힘이 있을 수 있다), 검은 풍선은 작품 「일시적인 완벽함」과 「7월의 아침」에서 돌기둥이나 석조 지붕을 들어 올린다. 중력에 순응하는 묵직한 현실은 전복된다.
'균형점' 전에서 균형을 이루어야 할 가장 큰 대상은 현실과 환상의 관계이다. 대개 현실은 묵직하고 환상은 가볍다. 환상은 피어오르는 것이다. 환상의 영역이 주 무대인 작가에게 현실은 고통까지는 아니어도, 풀어야할 묵직한 과제로 다가온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이를 현실원리와 쾌락원리로 대조한다. 제이 그린버그와 스테판 밋첼이 쓴 『정신분석학적 대상관계이론』이 요약한 바에 의하면, 현실은 억압, 자기기만, 나쁜 신념, 혹은 포기된 행동이라는 복잡한 과정들을 통해 합리화된다. 현실원리는 의식, 주의집중, 지각, 공정한 판단력(현실검증), 행동 그리고 사고를 포함하는 광범위한 것이다. 또한 현실원리는 충동 때문이 아니라,, 충동이 현실세계와 갖는 관계에서 온다. 정신분석학은 현실이 억압하는 세력들로 심리에 개입한다고 본다. 아이는 내적 욕구들을 만족시키지 못하고 좌절할 때 현실에 관심을 갖는다. 그가 욕구들을 자체 성애적으로 만족시킬 수 있을 때 현실은 거의 무시된다.
현실은 대중처럼 현실 그자체인 부류보다는 현실에 불만을 품은 소수가 관심을 가지는 대상이다. 환상에 빠져 살곤 하는 예술가가 현실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이유는 현실에 대한 불만이다. 그래서 가장 환상적인 존재들이 현실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역설이 발생한다. 그래서 예술적 아방가르드는 정치가나 보통사람들보다 더 급진화 되곤 한다. 물론 그러한 참여에 대한 환멸 또한 깊다. 정신분석학은 현실원리가 갈등을 통해서 나타난다고 본다. 현실 원리는 자아와 초자아에 전달되는데, 이는 주체에게 내면화 되는 권위와 문화적 전통의 창조물이다. 그것은 가혹함과 강제성을 특징으로 한다. 이러한 현실과 달리 '욕동의 방출에 의한 쾌락추구가 인간의 근본적인 동기'(프로이트)이다. 사회적 현실과 달리, 쾌락은 무의식적 과정들에 충실하다. 정신분석학에 의하면 현실은 욕동을 방출시켜 쾌락을 얻거나 현실원리를 통해 쾌락을 지연시킨다. 그러나 필요한 것은 현실적응 이상이다.
현실이 불만스러우면 내가 바뀌든지, 현실을 바꾸든지, 또는 대안의 현실을 찾아 떠나야 할 것이다. 외적 현실만을 강조하면 적응만을 말하게 된다. 그 때 요구되는 것은 현실의 권력에 순응하는 처세술이나 '행동주의 학습이론' 같은 전략일 뿐이다. 작가는 이전 작품 「미술관」(2014)와 「공중 도서관」(2014)에서, 미술관이나 지식의 권력을 풍자하기도 했다. 고립되어 보이는 미술계나 학계 역시 현실정치의 판을 복제하곤 한다. 그러나 작가는 이러한 질곡의 현실을 넘어서는 원리로 쾌락원리를 호출한다. '균형점' 전은 '예술은 쾌락원리와 현실원리를 화해시킨다'(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적 가설에 조응하면서, 내부로부터 발생하는 욕동의 수위를 조절하여 바깥 현실과 균형을 잡으려 한다. 그것은 개인/사회의 문제로 부연 설명될 수 있다. 개인의 심리세계에서 의식과 무의식이 상층/하층으로 역학관계를 이루듯, 그렇게 이질적인 운동 속에서 균형점을 찾는 개인은 궁극적으로 사회에 속한다.
정신분석학은 개인의 욕동을 중심에 놓는가/타자와의 관계를 중심에 놓는가에 따라 양대 계파로 나뉜다. 이번 전시는 초기 작품이 개인의 욕동에 초점을 맞춘 것과 달리, 관계를 중시하는 중심의 이동이 보여 진다. 그것이 나만의 문제였다면 그림이라는 타자와의 소통 장치는 필요 없을 것이다. 『정신분석학적 대상관계이론』에 의하면, 프로이트가 원본능과 자아를 구분한 것은 원시적이고 반사회적이며 통제되지 않는 충동과 외부세계가 요구하는 지식과 능력을 구별하기 위해서다. 프로이트의 욕동구조 모델은 욕동과 그 조절, 에너지와 그 에너지의 조직과 기능에 초점을 맞춘다. 반대로 관계모델 이론가들은 정신구조가 욕동긴장을 조절하려는 욕구에서가 아니라, 타인과 관계를 맺으려는 욕구에서 발생했다고 본다. 사회는 그러한 개인의 욕동과 욕동이 만나는 장이다. 즉 우리는 사고와 행동의 원천 뿐 아니라 관계를 중시해야 한다. 무의식과 의식 자체가 아니라, 서로의 관계가 중요하듯이 말이다.
'균형점' 전은 인간은 개인적이면서도 사회적인 동물이라는 오래된 이중적 조건을 직시한다. 물론 고전적인 정신분석학은 이 문제를 간과하지만은 않았다. 「문명과 그것의 불만들」에서 사회 자체가 인간의 선천적인 본능적 성향들을 포기하도록 강요한다고 강조한 프로이트는 『집단 심리학과 자아의 분석』에서 미묘한 강조점을 보여준 바 있다. 그는 '개인의 정신적 삶은 모델로서, 대상으로서, 돕는 자로서, 적대자로서, 다른 누군가와 항상 관련되어 있다. 그래서 맨 처음부터 개인심리학은 넓은 의미에서 사회심리학이기도 하다'고 주장했다. 욕동보다 관계를 중시하는 학파들에게 인간의 만족과 목표는 공동체 안에서만 실현된다. (주체의)욕동보다 (타자와의)관계를 중시하는 정신분석학파가 등장하기 이전에 이미 '인간의 본질은 개인의 사회적 관계의 총체'(마르크스)라는 주장이 있었다. 이러한 관계적 사고에서 본다면, 삶은 타자와 관계를 맺고 상호작용하고 사회에 참여함으로서 완전해질 수 있다.
조은정이 추구하는 균형점은 개인 안의 균형점을 넘어 타자와의 균형점을 지향한다. 자아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집(건축)은 타자를 향한 문을 낸다. 이런 저런 문은 균형점을 찾기 위한 조건이다. 이 문을 통한 왕래가 충분치 않더라도 타자와의 소통문제는 자아의 핵심에 이미 들어와 있다. 인간은 타자들과 아무런 상관없이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애초부터 인간은 타자 없이 생존할 수 없다. 나무나 숲이 등장하는 작품에는 독립된 존재로서의 개인과 공동체의 일원으로서의 개인의 공존이 있다. 여기에서 공존하는 타자는 같은 인간 뿐 아니라, 동식물 같은 자연과 무의식을 총괄한다. 무엇보다도 예술 자체가 타자화 되었다는 것, 이 타자화는 사회의 지배적 질서에 저항하는 힘이 아니라, 그 질서의 하위범주로 전락해 가고 있다는 위기의식이 작가로 하여금 '균형점'을 추동하게 했을 것이다.
이선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