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urred Mass: 변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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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무리의 감촉 - 2008년 이후의 삶에 대한 어떤 감성
변경수의 작품에는 세계화 시대 이후 대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겪고 있는 생활 감정의 변화가 직관적으로 포착되어 있다. 특히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를 추동하였던 금융자본주의가 파산 선고를 받았던 2008년을 기점으로 대도시의 일상에 미묘하게 확산되고 있는 균열의 징후가 그의 작품에서는 하나의 증상처럼 드러난다. 그러한 시대상은 의식적으로 드러낸 것이 아니라, ‘만들고 싶은 것을 그냥 만들 뿐인’ 꾸임 없는 작업과정 속에 묻어난 것이라 더욱 다층적인 울림을 전한다.
변경수는 자신의 작업이 “동시대적 경험을 바탕으로 실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을 그려내는” 행위라고 밝힌다. 그가 언급하는 동시대적 경험은 서울, 런던과 같은 메트로폴리탄에서의 삶이다. 자본의 활기찬 순환에 발맞추어 사람이건 물건이건 항시 신상품과 같이 트렌디하게 매끈거려야 하는 세련된 세계. 2008년 이전에는 싫건 좋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러한 세계가 지속될 것이라는 믿음을 공유할 수밖에 없었다. 2007년에 있었던 개인전을 통해 첫 선을 보였던 변경수의 작품도 그러한 믿음 속에서 대도시의 삶을 향유하는 사람들의 가볍고 발랄한 모습을 특유의 익명적인 형상을 통해 나타내었다. 눈코입이나 옷과 같이 정체성을 증명할 수 있는 표지들을 생략시킨 체 만화 속의 인물처럼 친근하고 귀엽게 표현된 그 형상들은 CF의 배경처럼 환영(幻影)적인 메트로폴리탄의 일상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벤치에 앉아 있거나, 숍에 들어서는 도시인의 모습으로 표현되었던 그의 인물들은 곧잘 풍선을 잡고 공중에 떠있거나 날아다니고 있는 우주인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났는데, 이러한 형상에서 표출되는 무중력의 정서에는 2008년 이전 세계의 들뜬 생활감정이 고스란히 표출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가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던 2008년, 솜사탕과 같이 달콤하고 가벼웠던 무중력의 세계는 무너졌다. 전 세계 대도시의 안락한 삶을 뒷받침하고 있었던 자본의 흐름은 결국 돌려막기를 거듭하고 있는 거대한 부채의 순환임이 드러났다. 공교롭게도 변경수는 그러한 쓰나미의 여파에 직접적으로 노출된 곳에서 유학생활을 했다. 특히 2011년 여름, 런던 인근에서 발생해서 영국 전역으로 확산되었던 이른바 ‘청년 폭동’은 2008년 이전 세계의 파산을 실감케 하는 사건이었고, 그는 이를 현지에서 경험하였다. 2012년 서울의 한 갤러리에서 열렸던 두 번째 개인전에서, 그의 익명적인 형상들은 중력이 작용하는 엄혹한 현실 세계로 모두 내려와 있다.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는 모습, 역도를 하는 모습, 곧 물속으로 들어갈 잠수부의 모습 등 모든 형상들이 무거움과 하강(下降)의 코드에 붙잡혀 있다. 특히 풍선을 뒤집어쓴 채 지상에 발을 딛고 있는 한 형상은 ‘씁쓸 달콤한 인생 (Bitter sweet life)’이라는 그 전시의 제목과 함께 작가의 변화된 ‘동시대적 경험’을 단도직입적으로 나타내었다. 갑작스레 도래한 중력의 세계를 반영하는 그의 형상은 더 이상 친근하거나 귀엽지 않았다 (그는 쓰레기 비닐과 후드 티셔츠와 같이 2011년 영국의 청년 폭동을 직접적으로 연상시키는 시각적인 코드를 도입하였다).
이번 전시에서 ‘Blurred mass’라는 함축 가득한 제목과 함께 새롭게 선보이는 그의 작품은 2008년의 파산 선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대도시의 삶에 대한 작가의 솔직한 시선이 반영되어 있다. 그는 이미 런던에서 있었던 한 전시에서 ‘툭 치면 한 번에 흩어질 것 같은’ 삶의 느낌을 포스트잇으로 나타낸 일상의 풍경으로 표현한 바 있다. 그와 같은 도시적 삶의 허약한 존재감에 대한 모티프는 이번 전시에서 변형된 형태로 나타난다. 변경수는 자신의 작업노트(그는 포스트잇을 작업노트로 쓴다)에서 오늘날의 삶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 결코 복잡한 무엇이 아니라, ‘단 하나의 구름 같은 단일한 느낌의 가벼운 덩어리’라고 기술한다. 또한 그는 ‘소중한 것들이 기억 안 나는 기분’과 ‘중요하지 못한 무엇이 된 것 같은 느낌’에 휩싸여 ‘살아있지만 기억이 없는 어떤 존재’에 대해 의문을 표한다. 그리고 이러한 고민은 변경수의 작품 세계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온다.
그는 이제까지 단수(單數)적인 형상이나 풍경을 통해 자신의 세계관을 드러냈다. 하지만 이번 전시에서 그는 ‘실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을 그려내고자’ 한다. 그리고 그것은 복수(複數)적이고 추상적인 무엇이다. 그는 그것을 아련한 색조를 띤 아지랑이와 같은 형체로 느낀다고 했다. 전시의 제목인 ‘Blurred Mass’도 그러한 맥락에서 선택된 것이다. 뿌옇게 무리를 이루고 있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실체’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주로 사람’이다. 그는 복수의 사람들로 이루어진 무리 혹은 아지랑이가 매우 추상적인 존재감을 지니지만, 오히려 매우 구체적인 상황을 연출하여 역설적으로 나타낼 수 있다고 말한다. 물론 이 때 그가 확보하고자 하는 구체성은 예전처럼 일상의 안락한 표면에서 직접적으로 포착되는 것이 아니라, 위태로운 일상의 이면에서 간접적으로 추출되는 무엇이다. 그것은 도심의 번화가에서 붐비고 있는 사람들을 가만히 바라볼 때 문득 지각하게 되는 불가사의한 덩어리의 감촉이기도 하다.
그처럼 은폐된 실체에 대한 생경한 직관을 나타내고 있는 작품이 바로 전시장의 벽면에 걸려 있는 부조(?)들이다. 그것은 멀리서 보았을 때엔 흑백과 컬러의 노이즈로 가득한 벽걸이 TV의 화면처럼 느껴지고, 가까이 다가섰을 때엔 자그마한 인체 형상들이 끝없이 뒤엉켜 있는 덩어리로 지각된다. 먼 시점에서 느껴지는 비실체적인 뿌연(blurred) 이미지와, 가까운 시점에서 지각되는 실체적인 덩어리(mass)의 교차는 작가가 드러내고자 했던 ‘단 하나의 구름 같은 단일한 느낌의 가벼운 덩어리’를 효과적으로 구현한다. 하지만 이 작품을 접하는 관객에서 보다 강력한 심리적인 파장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TV화면의 노이즈를 닮은 이 반(半) 실체적인 형상에 배어 있는 일시에 증발할 것 같은 위태로움이다.
리모컨 버튼 한 번 누르는 것으로 사라져 버리는 TV화면처럼, 아무런 흔적 없이 기억 없이 망실될 수도 있는 세계. 아마도 이것이 2008년 이후 생명을 잃었으면서도 유령처럼 계속 지속되고 있는 대도시의 삶 속에서 작가가 경험하고 있는 허무의 실체일 것이다. 변경수는 이번 전시에서 자신이 십 여 년 동안 지속했던 익명적인 인체 작업과는 전혀 다른 맥락의 인체 작업을 시도하는데, 거기에서 인체는 더 이상 메트로폴리탄이라는 환영적인 시공간에 안락하게 순응하고 있는 캐릭터가 아니다. 다차원의 홀로그램을 중첩시켜 놓은 것 같은 새로운 형상 속에 인체는 제 나름의 개별성을 간직한 채, 자기만의 시공간 속에 고립되어 있다. 기묘한 점은 그처럼 개별적이고 독립되어 있는 형상들이 한 덩어리로 중첩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또 다른 성격의 ‘Blurred mass’를 이루며 전시장의 가운데에 놓여 있는 형상은 벽면의 ‘mass’와는 다르게 기묘한 안정감을 준다. 마치 아날로그와 디지털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했던 삶의 양식이 아날로그적인 끈끈한 유대를 결국 포기하고, 서로가 서로를 허깨비처럼 여기면서도 파열 없이 공존할 수 있는 ‘디지털적인’ 존재론에 안착한 것 같은 느낌이다. 그 속에는 이미 있었던 세계의 균열 사이에서 움터나고 있는 또 다른 세계에 대한 아스라한 지각이 담겨있다. 도래하는, 혹은 이미 당도해 있지만 우리가 아직 인식하지 또 다른 세계는 과연 어떤 세계일까? 변경수는 그 낯선 세계에 대해 어떤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일까? 하지만 작가에게 이에 대해 명확한 해답을 강요할 수는 없다. 다만 이미 있는 세계에서 나타나는 미세한 변화를 다가오는 세계의 낯선 징후로서 포착하는 그의 감성과 직관이 더욱 예민해지기를 바랄 뿐이다.
강 정 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