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현 顯現: 구자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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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ss release
구자현의 목판화, 스크린 판화에 대해서
최승훈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
시간의 집적 - 스크린
오랜 기간에 걸친 석판화 작업에서 스크린의 영역으로 이행하며 우선 두드러지게 비교되는 점은 기법이다. 석판화의 평판기법과는 상이하게 다른 스크린의 공판기법으로 이행함에 따라, 단색조 시리즈에서 색면으로의 전환은 획기적인 어법의 개발을 가져왔다. 무채색에서 유채색으로, 단색에서 다색으로, 오랜 공정과정에서 빠른 공정으로, 감정적 절제에서 발산으로 새로운 지평을 연 것이다.
이 색면 작업은 색채의 시각적 효과로 심미성이 높다. 석판화에서 무채색을 통한 정신적 깊이를 보여주었다면 스크린에서는 색면을 통한 경쾌한 시각적 쾌감을 노래한다고 볼 수 있다. 색료(잉크)의 맛깔스러움은 단순하지만 밀도있고 완성도가 높아 스크린 판화의 전형을 보여준다.
매우 단순한 형태에서 깔끔함과 세련미를 느낄 수 있는 스크린 작업은 구자현의 또 다른 어법에 대한 탐구이다. 석판화에서의 해먹의 무채색, 그리고 행위와 점성의 질료가 만들어내는 얼룩 이미지와 비교하면 전혀 다른 국면으로 전개됨은 파격적으로 보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색면 작업은 그가 이른 시기에 제작한 바 있는 작품에 이어지는 것이다. 미술학도로서 연구할 적의 드로잉 작품을 보면 둥근 원형태에 대한 연구가 시도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심층에 잠재되어 있던 원과 색채의 기억이 다시 살아난 것이다.
스크린에 등장하는 원, 타원은 의도적으로 중심을 조금씩 옮겨가며 어긋나게 찍혀있다. 약간씩 중심을 옮김으로써 가장자리에 색면의 띠를 남긴다. 석판화에서와는 달리 스크린에서의 작품의 특징은 색면을 한겹 한겹 덮는 데 있다. 먼저 올린 색면은 차례로 뒤에 덮이는 색면에 가려 사라지고 다만 색띠를 가장자리에 남김으로 행위의 전후, 시간의 흐름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색면은 하나하나가 시간의 층을 이루며 시간적 선후를 보여준다. 그러니까 우리가 보는 것은 진행된 시간의 흐름을 보는 것이다. 스크린은 새로운 시간성에의 탐구를 가능하게 했다. 즉 석판화에서 행위가 멈추어지고 판면의 흔적을 고스란히 화지에 옮기는 것이, 정지된 한 순간, 한 시점의 흔적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스크린에서의 색면은 한겹 한겹 덮여짐으로써 경과된 시간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시간의 흐름을 가시화하려는 구자현은 스크린에서도 완벽한 기술을 구사하기 위하여 세심한 노력을 기울인다. 일정한 속도와 압력의 유지로 동일한 두께로 색면을 입히는 프린팅 과정이나 화지의 건조, 보관 등의 모든 면에서 이루어지는 고난도의 기술은 대형판화에 대한 그의 강한 제작의욕과 식을 줄 모르는 그의 열정을 새삼 느끼게 한다. 제작과정에서의 작가 스스로와의 고군분투는 더욱 그의 수행적 작가적 면모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수행의 행위 - 목판화
구자현의 목판화는 전면회화에 속한다. 판위를 새겨나가는 목판화에서 그의 행위는 intervention의 개념을 득한다. 주어진 여건 위에 의도적 개입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전 작업을 보면 석판화에서 질료의 성질에 따른 우연성을 수용하고 있었고, 스크린에서는 색면으로 화지를 덮어나갔다. 이 두 작업에서는 행위 못지않게 질료에 비중이 실린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목판화에 오면 그의 행위는 더욱 명백하게 드러나고 인식된다. 단단한 목질의 나무는 조각도로 새겨나가는 그의 손길을 정직하게 드러낸다. 판면 위엔 그의 행위만이 남는다. 판면을 조각도로 새겨나가는 반복적 행위는 작품의 핵심이다. 그 행위는 무목적의 무상한 움직임이다. 마치 플럭서스의 머스 커닝햄이 단순한 동작을 반복하듯 구자현의 동작은 어떠한 서사성이나 재현의 목적도 없이 마냥 판면을 일정한 밀도로 새겨 나가는 작업이다. 행위는 재현의 의지를 떠남으로 해서 그 자체가 문제의 대상이 된다. 이건용의 행위에서와 같이 나름대로 설정한 법칙에 따른 행위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건용의 행위는 신체 측량적 또는 신체성의 확인, 또 시간적 경과에 따른 흔적을 남기게 되는 구체성을 지니는 반면에, 구자현의 행위는 수행적 측면이 강하다. 그의 행위는 유한한 판면을 넘어 무한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렇게 함으로써 구자현은 무념무상의 정신에 도달하게 된다. 측량가능한 공간과 시간의 개념을 초월하는 경지에 다다르게 되는 것이다.
석판화나 스크린에서와는 또 다르게 목판화에서는 칠하거나 긋는 행위와 달리, 조각도를 쥐고 몇몇 방향으로 가지런히 파 새기는 단순 반복행위를 함으로써 무상념의 세계에 이르는 것이다. 결국 일정한 밀도로 나열된 새김의 흔적은 무수한 반복행위를 통하여 무한한 평면성을 제시한다.
목판화에서는 한지로 프린팅이 이루어진다. 그가 만든 특허지인 KOO지가 사용된다. 목판화엔 한지가 제격이라는 구자현의 판단은 아주 오래된 확신이다. 안료의 성격에 따라 차이가 있겠으나 그 안료를 흡수하고 발색의 정도를 느끼는 매우 섬세한 감각에 의한 판단이라고 생각된다. 구자현은 한지의 자연성과 내구성에 대하여 일찍이 눈을 떴을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선친의 서예활동을 곁에서 접했던 구자현은 한지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갖을 수 있었을 것이며 다양한 한지의 특성에도 예민하게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그가 선택한 나무종류, 판각 도구, 가해진 힘과 동작, 한지 선택, 프린팅 방법 등 목판화에 배어있는 체화된 전문성은 구자현의 진정성과 긴 작업의 연륜을 말해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