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幽眞): 김병훈

6 - 27 May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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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ss release
김병훈-실경과 선경 사이
 
                                                  박영택 (경기대 교수, 미술평론가)
 
 
 모든 풍경사진은 일정한 표상시스템에 따라 자연을 이미지로 재현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어떠한 대상을 자연이냐고 규정하고 인식하는 일이자 자연이라는 개념으로 표상되어 있는 것에 의존한다는 얘기다. 그렇게 '자연이라고 표상된 대상을 재현하는 것이 풍경사진'인 셈이다. 이 땅의 작가들은 이곳에서 강제되는 일정한 풍경의 표상시스템이나 한국적 자연관 등에 영향을 받으면서 풍경을 본다. 이미 수많은 작가들이 그러한 과정 속에서 한국의 풍경, 한국적 자연관을 재현해 놓았다. 그 이미지는 학습되고 각인되어 영향을 끼친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그렇게 선험적으로, 내려오는, 일정한 틀이 되고 규범이 되는 자연관을 의심하고 지우고 다시 생각해보는 일이다. 풍경은 결코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보는 사람의 주관에 따라 크게 달라지는 것이자 작가의 풍경관, 자연관에 의해 다양하게 해석된다. 그러니까 풍경은 중립적 대상이나 고정된 개념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는 사람의 인식을 통해 비로소 의미가 부여되는 것이다. 
 
 김병훈의 사진 속 풍경은 익숙한 장소다. 그곳은 이 땅의 절경이고 명승지이자 이상향으로 간주되어 온 곳이라 오랫동안 수많은 이미지로 재현되어 온 곳이기도 하다. 많은 이들이 그곳을 탐방했고 화가와 사진가들 또한 그 풍경을 오롯이 담아냈다. 아마추어 사진가들과 일반인들의 풍경사진 그리고 일요화가들의 풍경화나 이른바 이발소 그림 등도 그러한 풍경을 지속해서 재현하고 있다. 그로인해 그 풍경, 장소에 대한 하나의 상, 관념이 생겨났고 이는 그 풍경을 전적으로 대변하게 되었다. 따라서 모든 이들은 대개 그 관점에서 특정 장소를 공유하고 감상한다. 김병훈 역시 그곳을 탐승하고 경험하면서 이미지를 채집한 후 그것들을 재조합, 변형하면서 자연스러운 풍경 사진을 만들었다. 그런데 그는 지금까지 재현되어온 시선, 재현의 관점이 아니라 구체적인 장소, 풍경을 전적으로 포괄하는, 그 진면목이 온전히 보일 수 있는 시점에 대해 다시 탐구하는 지난한 과정을 겪는다. 그것은 결국 자연, 장소, 공간에 대한 한국인의 전통적인 사유와 안목의 체득에 의한 것이다. 그로인해 익숙한 장소가 다시 보이고 지금까지 재현된 장소에 대한 상이 벗겨지면서 비로소 그 풍경, 장소가 지닌 ‘진상’이 드러난다고 믿는다. 김병훈의 이런 시도는 풍경에 대한 상투적 관념으로부터의 비껴남이자 한국 전통적인 자연관과 풍수관에 영향 받은 사진적 시도이고 우리 선조들이 이 땅에 살면서 체화된 미의식의 확인 작업이기도 하다는 생각이다. 결과적으로 그는 풍경에 대한 기존의 시선이나 관념을 지우고 자신의 눈으로, 몸으로 그 풍경 앞에서 깨달은 것을 사진으로 응고시키고자 했다. 그런데 그 깨달음이 안착하는 곳은 주어진 풍경이 지닌 숨 막힐 듯한 아름다움, 탐미성이다. 숭고함과 아름다움으로 버무려진 이 풍경사진은 한국자연의 진정한 미와 이 땅이 지닌 의미, 역사, 문화 등을 상기시켜 주는 모종의 텍스트 같다. 산과 물, 정자와 누, 계곡과 폭포, 그리고 나무가 있는 풍경이다. 산수화에서 봤던 장면들이고 다분히 산수화적인 풍경사진이다. 옆으로 길게 누운 화면과 종으로 긴 화면에는 산과 폭포 등이 담겼다. 그것은 원근법적 시선이 아니라 보행시선이자 여러 시점에서 본 장면이 혼합되어 있다. 그는 산수화에서 이용되었던 조망과 와유, 앙각과 부각을 응용해 찍었다. 이를 통해 “우리 풍경의 본질적 의미를 되새기고자”(작가노트) 했다. 
 서양의 원근법은 고정된 한 눈의 관점에서 사물을 보는 가시적 공간을 구성한다. 서양의 회화적 구도는 자아와 세계를 서로 분명한 구획을 가진 고정된 실체들의 관계로서 파악한다. 반면 동양화에서는 고정된 하나의 관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변화, 혼융상태에 있다. 자연의 형태란 다만 고정된, 물리적인 실체뿐만 아니라 비물질적인 특질도 지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사실 세계는 고정되지 않는다. 세계는 정지태가 아니라 운동태며 존재가 아니라 생성이며 고정이 아니라 떨림과 흔들림이란 것이 동양인들이 깨달은 공간, 세계였다. 서구인들처럼 인간이 세계를 고정시킬 때 그 결과물은 개념적 언어이거나 또는 원근법에 의해 프레임 안으로 걸려들거나 카메라 뷰파인더 속의 사각형 속에 갇힌 이미지일 뿐이다. 우주의 끊임없는 변화의 장으로부터 (객체로서의) 실체가 분리되고 (주체로서의)실체 또한 사상되는 것이 그래서 동양의 그림이다. 모든 것은 실재이면서 동시에 끝없는 변화의 과정 속에서 존재한다고 본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물리적 재현이 아닌 정신적 재현인 셈이다. 동양화에서 중요한 것은 물리적 현상의 재현이 아니라, 현상의 경험이었다. 결국 그 응시 법은 다원적 시점이고, 움직이는 시점이 된다. 아울러 복판에 내재한 시점이다. 시점을 풍경의 복판으로 옮겨가는 것 즉, 그림 안에서 움직이는 관점인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실존의 시선’이다. 
 
 기존의 우리 자연을 찍은 사진들은 촬영에 용이한 특정위치에서만 찍혔기에 왜곡되고 과장된 부분이 있다고 본 김병훈은 선택된 특정 풍경을 다각도에서 관찰하여 실제로 우리가 육안으로 둘러보는 것과 같이 표현하였다. 그는 눈으로 바라보는 숭고하고 웅장한 자연을 그대로 사진으로 재현하는 일의 난점을 극복하기 위해 계획된 시선과 시점의 조합을 시도했는데 이는 사진의 물리적 한계인 시선과 광학측면을 벗어나 조선시대 진경산수의 개념을 끌어들인 것이다. 특히 여러 장의 장 노출 촬영을 통해 만들어진 이미지들의 결합은 순간이 아닌 지속성을 담고 있으며 한 장의 사진 속에 다층적인 시간의 겹들이 응축되어 있다. 그 결과 이 사진은 회화와 사진사이의 경계가 아득해진다. 과거의 시간과 현재의 시간이 맞물리고 응시와 기억이 뒤섞인다. 여러 시간과 계절 속에서 변화 하는 자연의 한 양상이 순간 멈추어 응고되어 있는 동시에 시간이 흐르고 있다. 불변하는 이미지와 가변적인 자연의 변화 속에서 흔들린다. 
 
 김병훈의 사진 속에는 한국의 자연 그러니까 산과 물(계곡), 나무와 풀, 그리고 건물(정자와 누, 사찰) 등이 놓여있다. 월출산과 청량산, 오대산, 대둔산, 마이산, 덕유산이 있고 연산폭, 옥계폭, 삼부연폭, 장각폭, 직소폭을 비롯해 도담삼봉, 도산서원, 암서재, 죽서루, 백운정, 추간정 등 아름다운 이 땅의 명승지들이 깊이 있는 흑백사진으로 길어 올려졌다. 그는 조선시대 문인들의 거주공간과 탐방행로를 따라 다녔다. 사계의 변화하는 시간 속에서 가장 절묘한 순간의 풍경을 담았다. 익히 아는 곳이고 가본 곳들이기도 하지만 그의 사진을 통해 비로소 그 풍경, 장소가 지닌 뜻을 헤아리게 된다. 이 풍경사진은 단지 특정 장소의 아름다움만을 기계적으로 확인하고 강박적으로 재현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곳의 장소성에 대한 인문적 사유를 촉발한다. 그 장소는 한국인이 꿈꾸던 이상적인 자연세계이다. 우리 겨레는 산의 정기를 타고나서 산기슭에 살다가 산으로 되돌아가는 삶의 여정을 살았다. 이상향은 산속에 있었다. 무엇보다도 산의‘빼어나고 기이한 지세’는 인간의 삶에 강력한 영행을 미치는 존재라고 여겼다. 따라서 지리와 천시를 인간사의 길흉과 연계시켰다. 한 나라 수도의 흥망은 지덕과 시운에 큰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 풍수도참의 사상이 그것이었다. 예를 들어 선비가 살 곳을 정할 때는 반드시 풍기가 모이고 앞과 뒤가 안온한 터를 가려서 오래 도모할 곳을 구해야 한다고 믿었다. 특히나 계곡 가에서 사는 것을 제일로 꼽았는데 이는 계곡을 끼고 사는 주거는 평온한 아름다움과 깨끗한 경치가 있고 관개와 농경의 이익이 있다는 것이다. 더불어 조선 중기 이후 심해진 당쟁과 사회를 계기로 사대부 계층에 은거하려는 분위기도 이에 덧붙여졌다. 따라서 산수는 유학자가 아름다운 자연을 보며 도덕 수양의 거울로 삼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었다. 이처럼 오랫동안 한국 사람들은 산천이라는 큰 생명의 토양에 뿌리내린 식물성의 생활방식을 살았다. 그러니 한국의 문화는 산에서 빚어진 산의 문화라고 부를 수 있다. 한국의 대표적인 이상향은 산에 있었던 것이다. 조선 중기의 유학자들은 산수를 도덕적으로 수양하는 공부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들에게 산수는 천지동정의 이치를 체현하고 있는 공부 텍스트이자 사물을 통해 자신을 성찰하고 존양하는 장소였다. 알다시피 인간은 특정한 공간에서 산다. 인간의 삶을 규정하는 핵심적인 장소인 그 공간에서 비로소 인간은 자신의 생각과 감각을 가설하고 부려놓으면서 삶을 영위한다. 사실 그 공간은 추상적인 것이다. 공간은 인간의 사유에 의해 탄생한다. 모든 공간은 그러니까 인간 사유가 서식하는 근원적이고 원초적인 여백인 셈이다. 인간의 감각활동의 하나인 예술이란 무엇보다도 주어진 공간에 제약을 받고 그 공간에서 파생된 삶의 체험과 감각, 느낌의 결정체를 말한다. 아울러 예술은 역사적, 지리적 공동체를 이상적으로 객관화하여 나타내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풍경 사진이란 인간을 둘러싼 공간에 대한 적극적인 인식행위이다. 나를 둘러싼 이 환경, 공간을 어떻게 이해하고 들여다 볼 것인가가 모든 예술행위의 근간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그 이전에 유일한 생의 조건이다.
 
 김병훈이 찍은 풍경은 한국인의 삶이 터전이고 그들의 생과 사가 온전히 하나로 묶인 공간이다. 산과 물이 있는 풍경이고 그 어딘가에 작게 건축물이 놓여 있다. 혹은 인간의 자취가 부재하고 영원한 순환을 거듭하는 천연의 자연만이 숨 쉬고 있다. 이 사진은 자신의 신체로 소요하고 더듬어 길어 올린 풍경의 편린으로서의 체취가 강하게 환기된다. 실제로 체득된 자연, 경험화된 자연이 응고되어 있다는 인상이다. 그래서 한국 산하의 특질에 대한 작가 자신의 경험적 감수성의 시선이 감촉된다. 작가는 한국 자연의 이곳저곳을 소요하면서 이를 사진에 담아왔다. 동일한 장소를 여러 번 다니면서 눈과 마음에 담아두고 그것이 모종의 깨달음으로 번져 나오는 시간을 기다려 촬영했다. 여러 번 가야 비로소 열리는 풍경의 내부를 기록한 것이다. 그러한 과정은 그 풍경이 무엇이며 어떤 의미가 있느냐를 질문하는 일이다. 동시에 자기 눈/몸으로 본 풍경의 진실된 측면에 가닿고자 하는 제스처이다. 사실 이곳 풍경을 찍는다는 것은 한국 산천의 특질을 헤아리는 일이자 그것의 사진적 재현이 어떻게 가능할까를 질문하는 일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것들은 특정 자연대상을 지시하지만 그것보다는 그 자연에서 받은 작가의 말할 수 없는 감흥, 자연만의 미세한 기운과 영성, 충만한 생명력 같은 것들이다. 작가는 자연에서 느낀 생명력, 이상한 기운, 미세한 소리를 사진 안으로 수렴하려 한다. 그는 풍경을 인화지의 얇은 표면에 올려놓았다. 그 사진은 자연의 영성, 기운, 호흡과 기미 같은 것들을 안개처럼 피워 올린다. 그래서 자연의 '생생불식'하는 기운을 감득하고 시정을 새삼 품어보게 하는 것이다. 그가 촬영한 장소가 애초의 탄생부터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간직하고 있는 그 모든 것들을 아득하게 경험하게 해주는 한편 자연이 지닌 에너지를 침묵 속에서, 경건하게 감득하게 해주는 사진이다. 
 
 김병훈[b.1974-, Kore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