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거나 앝은: 김진욱

11 September - 5 October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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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ss release

 

≪deep or shallow≫ 
함선미(예술학, 미술비평)
 
헤테로토피아적 풍경
   김진욱의 풍경은 기억과 동행한다. 구태여 구분하자면 풍경화의 범주를 서성이는 작품들은 한 눈에 구상적인 요소들을 가늠할 수 없도록 시선을 흔들기도 하지만, 이내 산과 바다, 나뭇잎, 사람, 동물, 달 등등의 소재들이 낯익은 모습을 빼꼼히 내보이고 있다. 작가는 주로 삶에서 채취한 기억의 요소들을 의식적으로 담아내는 과정에서 출발하여 무의식적인 현실의 충돌이 예측하지 못한 모습들을 불려가며 화면을 구성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그렇게 작품은 기억에서 부유하는 삶의 내적 흔적과 현실에서 연결된 물리적/실재적 흔적들이 결합된 총체물로 나타난 것이다. 이는 곧 삶의 다양한 범주에서 모인 잔해들이 그 자체로 엮인 풍경이 된다. 
  되짚어보면 김진욱의 작품은 인생의 여러 시기 속에서 축적된 다양한 시간들이 비연속적으로 병치된 결과이기도 하다. 따라서 한 화면 속에서 여러 시간이 중첩되고 그로인해 작품은 상이한 해석의 틀을 제공하게 된다. 이것은 푸코(Michel Foucault)의 ‘헤테로토피아(heterotopie)’에 관한 미완의 논의에서 다루어진 것처럼, 실제의 기억이 응축된 공간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실제의 요소들이 이질적으로 결합하여 비현실적인 효과들이 한데 엮인 공간으로 나아가고 있다. 
 
   우선 작가가 지속적으로 선보인 시리즈의 작품들을 들여다보면 익숙한 형상들이 교묘하게 숨어있고, 때로는 여러 형태들이 물거품이 되어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듯 보이는 모습이 특징적이다. 유독 그의 작품에서는 첫눈에 포착하기란 힘들지만 찬찬히 그림을 마주하는 시간 속에서 형상 속에 묻혀있는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들의 형상은 마치 어떠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화면 속에 뛰어들어 숨박꼭질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표현은 주세페 아르침볼도(Giuseppe Arcimboldo)의 화법처럼 식물과 같은 형상들이 사람의 실루엣 속에 중첩된 것으로 보이기도 하고, 혹은 곤충들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주위의 환경에 적응하며 모습을 바꾸는 의태(mimicry)의 행위처럼도 보인다. 이때 스스로의 모습을 조심스럽게 감춰두는 모습 속에서, 풍경 깊숙이 녹아있어 유심히 찾아야만 눈길이 닿을 수 있는 형상들은 어쩐지 깊은 밤 정처를 모르고 밀려드는 불안감을 떨쳐내기 위해 이불 속에 몸을 숨기는 것과 같은 심경이 복잡하게 얽힌듯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작가의 근작들은 ‘불안’에 관한 삶의 한 국면을 염두에 두고 발현되었다. 전작들에 비해 보다 구체적인 하나의 상황, 감정이 맞물리는 모습에서 시작한 작품들이다. 그것으로 누구에게나 근원적으로 자리하는 불안들, 뚜렷하게 알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삶의 도처에 자리하는 불안한 경험들을 낯설게 모아 새로운 인식을 이끌어내고 있다. 
 
불안에 관한 거시적 조감도
  과거에서부터 지속한 시리즈의 작품들은 빼곡한 라인들로 화면을 가득 메운 형상들 속에서 조금씩 가미된 색감의 차이로 인해 공간과 거리감을 더듬거리며 하나의 풍경으로 마주하게끔 한다. 그에 반해 ≪deep or shallow≫ 전시에서 새롭게 소개하는 신작들은 파격적으로 간결해진 구성이 먼저 초점을 모은다. 재료에 있어서도 장지 위에 먹으로 빼곡하게 드로잉을 하던 이전의 작품들과 다르게 푸른 안료를 섞은 에폭시(epoxy)를 화면 위에 널찍하게 부었고, 그 가장자리를 메우는 재현의 형태들도 종이를 반죽한 부조형식으로 선보이며 보다 입체적이고 촉각적인 작품들을 의도하였다. 
  아울러 시점에 있어서도 전작들이 스스로의 이야기들을 그림 속에 숨겨두거나 그 안에 미시적으로 빠져들었던 것과 달리, 근작들은 삶을 보다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관조적으로 시각화한 것처럼 일종의 조감도와 같은 형식을 노출한다. 이에 화면은 하늘 위 어딘가에서 우리의 세계와 작가의 삶 속 어느 지점을 포착한 듯, 다소 평범할지도 모를 공유된 풍경들이 펼쳐져 있다.
 
  돌이켜보면 불안은 늘 경험 이전의 것으로부터 찾아들었다. 때문에 스스로가 지금 이 순간에 겪고 있지 않은 어떠한 일이 예측할 수 없는 것으로 남겨진 채 불안함을 불러일으키는 형태이다. 김진욱의 과 같은 작품에서는 어두운 바다의 심연, 혹은 안개가 자욱한 형상 등으로 모든 것이 뚜렷하게 노출되지 않는 모습 속에서 일종의 불안에 대한 은유를 시도한다. 이번 전시에서 수차례 등장한 바다의 풍경들은 특히나 짙은 농도를 통해 그 깊이(deep or shallow)를 짐작할 수 없는 장치들로 등장하며 불안에 관한 정서들을 대변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역으로 불안의 징후들이 어떠한 정체로 머무는지 헤아릴 수 없는 상황들을 내보이며 생각에 따라서는 안도감마저 제시한다. 
  반대로 과 같은 작품에서는 한낮의 풍경 속에서 빛이 내려앉아 눈부시도록 새하얀 광경이 등장하는데 이때 작품 속 어딘가에는 아이러니하게도 달의 모습이 갇혀 있기도 하다. 그렇게 작품은 불안함에서 시작하지만 그와는 생경한 밝은 화면이 공존하였고, 어둠과 밝음, 흡사 낮과 밤이나 태양이 작열하는 대낮에 감춰진 달의 모습을 함께 들추어내며 이중적인 상황이 오버랩되는 모습을 꾸준하게 보이고 있다. 그로 인해 작품은 초현실주의의 용법에서 나타난 기이한 만남들과 언캐니(uncanny)한 정서를 담고 있음에도, 그 불안의 심연을 어둡게 가두지 않는다. 
 
  더욱이 나 에서처럼 김진욱의 작품은 언제나 위장된 상태이다. 그것은 작가의 불안한 현실을 엮어가는 실재적 공간이지만 화면 속에서 서로 뒤엉켜 환상처럼 탈바꿈하는 헤테로토피아적 공간이기 때문이다. 작품들은 이러한 과정을 거쳐 새로운 상황, 새로운 감정으로 증식하며 삶과 그 안에 자리한 불안이 머금은 이면의 모습을 끄집어내려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deep or shallow’를 알 수 없는 상태로 삶의 언저리를 맴도는 불안의 얄팍한 정체, 나아가 나름의 낙관적인 시선들까지도 목도하게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