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행된 풍경: 조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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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動詞)로서의 풍경
W.J.T 미첼(Mitchell)은 ‘풍경과 권력(Landscape and power)’에서 ‘풍경(landscape)’을 명사(名詞)에서 동사(動詞)로 그 의미를 전환 시킨다. 그에게 ‘풍경’은 보여 지는 대상이나 읽혀져야 하는 텍스트가 아닌, 사회적이며 동시에 주관적인 정체성을 형성해나가는 하나의 과정이다.
풍경은 피사체로서 바라보여지는 대상이 아니다. 나와 물리적으로 연결된 나의 유기적 확장체이다. 나의 몸은 나의 집 안에서 다양한 접촉으로 시간과 공간, 존재를 공유함으로써 확장되고, 이런 집들(또는 아파트들)은 모여 하나의 건축물을 이루며 제한된 땅에서 얽기 설기 구조화 되어 삶을 지원한다. 이들은 반복과 변주로 확장하여 도시를 이룬다. 방을 나서서 집 밖으로,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거리를 걷고 도시로 나갈 때처럼 나의 존재는 조금씩 더 큰 세계로 연결되어 ‘풍경’을 만난다.
그러나 ‘풍경’은 없다. 높은 아파트와 빌딩들은 원거리의 풍경을 가로막고 근거리의 건물과 거리들만 허락한다. 원거리의 도시의 모습을 조망하려면 운전대를 잡고 올림픽 도로나 강변도로를 달려야 한다.
변화를 감행하는 풍경은 말한다.
“너는 낡았어. 너는 초라해.” “나는 다시 태어나고 있어. 그런데 넌....”
기억이, 추억이 낡은 건물과 함께 소멸하고 그 위에 영원히 시들 것 같지 않은 건물들이 자란다. 영생을 얻은 것처럼 당당한 자태로 서 있는 건물들은 영생을 얻지 못한 사람들의 소유다. 그 새로움이 소유자들의 욕망을 채우고 자본주의를 안도하게 한다. 그러나 ‘나’와 더 많은 ‘나’들에게 조망되어진 풍경은 매끈한 표면의 껍질이다. 감행된 욕망이다.
나의 소유가 아닌 그들의 ‘풍경’은 더 이상 ‘타자’가 아니다. 그것은 시각과 공간으로 나의 눈과 몸에 화학반응을 일으켜 나의 감성들을 어떤 식으로든 점유한다. 오늘도 어떤 ‘나’가 파괴되고 지워지고 또 새로 자라난다. 그것은 표피적이고 폭력적이다.
그림 그리듯 구축하기
머릿속 떠다니는 이미지들 중 하나를 잡아채어 ‘심리적 풍경’이라는 작업에 들어간다. 통상적으로 사용 되어 왔던 아이소핑크라 불리는 고강도 스티로폼과 종이 상자의 겉면, 몇 종류의 접착제가 사용되고 재활용품이나 다양하고 산발적인 재료들이 사용된다. 에스키스를 그리지는 않는다. 대신 작업의 크기를 가늠하거나 도면이 필요할 때 그림을 그리곤 한다. 빈 캔버스에 밑그림을 그리 듯 커다란 덩어리를 잘라낸다. 열선을 이용해 잘라내다 보면 언덕이 되고 길이 되고 나무가 된다. 아직까지 작업은 새벽안개 속 흐릿한 물체들만큼이나 모호하다. 기대가 되기도 한다. 어떻게 될까? 마지막에 어떤 모습으로 무슨 말을 할까? 이제 조금 자세히 해야 할 차례이다. 구체적인 형태를 만들기 위해서는 사진을 찍거나 자료를 찾아본다. 실제 나무를 사용하기도 한다. 용접을 해서 이어 붙일 때도 있다. 큰 덩어리와 작은 덩어리들 또는 서로를 이어붙일 때는 오공 본드나 글루건, 순간접착제나 스프레이 접착제를 적절히 사용한다. 형상들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이제는 종이들을 얇게 뜯어내어 붙인다. 밝고 다채로운 색은 아니지만 그려진 그림위에 색을 칠하는 회화의 과정과 유사하다. 입체적인 형태의 표면적을 다 붙여야하기 때문에 지루하고 지난한 과정이지만 이런 단순한 반복은 때로는 성취감을 주거나 머리를 맑게 해주기도 한다. 그리고 나서 몇 가지의 과정을 더 하면 작품이 완성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나의 작업들이 회화적이라고 쉽게 단정할 수는 없다. 회화의 평면에 없는 덩어리와 공간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덩어리와 선들이 공간 안에 잘 놓이도록 자리 잡는 과정을 무척 중요하게 여긴다. 또한 모든 사람들에게는 건축적인 감성들이 내제한다고 생각하는데 이 과정들은 구축적이며 내 안에 있는 건축적인 감성들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지금까지의 과정을 복기할 때 혹시 그림을 그려보거나 형태를 만들어보지 않은 이들은 각각의 과정마다 같은 강도의 수고로움이 들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나의 의도와 달리 다른 쪽으로 가려하는 재료들에게 끌려 가기도하고 그 것에 끌려가지 않으려 나로서는 고집을 부리기도 하다가 티격태격 싸우기도 하고 내가 토라져 재료들을 거들떠보지도 않거나 재료들이 삐져서 애를 먹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재료와 나의 의지의 중간 어느 지점에서 결정된다. 그것은 재료와 나의 타협일 수도 있고 나의 손을 통해 나온 어떤 숭고한 이끌림 같은 거라고 이야기 할 수도 있겠지만 명확한 것은 나의 손, 그러니까 나의 몸이 물건들, 재료들과 함께 나눈 이야기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분명한 시각적인 이미지에 길들여진 요즘, 손으로 만지고 자르고 찢고 잇고, 붙이고 다듬고를 반복하는 이 촉각적인 감각들을 이용하는 행위들이 무용(無用)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느리고 지루한 과정들이 우리를 동물이 아닌 문명으로, 하나의 존재로서 여기까지 오게 하였던 것은 아닌지, 쓰임이나 요구에 맞게 재료를 탐색하고 손으로 다루어 만들어낸 그릇과 도구들, 집과 무덤들 거리와 모든 것들을 만들어내었기 때문에 우리가 사라지지 않고 존재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무엇이든 기술과 과학으로 척척 지어내고 만들어내는 요즘. 내가 느끼는 감각들과 생각들을 손으로 다루어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한다.
‘감행된’ 이라는 단어가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무모하거나 어렵거나 비난을 받을만하더라도 과감하게 실행된’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지닌 이 용감하고 거창한 단어가 내게는 ‘ 협의 없음’과 ‘공감 결여’등으로 읽혀진 것은 너무 빠르게 변해가는 건축들이 만들어내는 풍경의 무모함과 연결되어서 일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작업을 ‘감행한다.’ 거대함과 보잘 것 없음, 자본과 속도, 음모와 은폐, 관습과 혁신, 소비와 가난들 사이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이것 밖에 없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