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표면: 권윤희 나경 도병락 이재헌 정세원 조헌 홍경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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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표면
모든 이미지는 얇고 납작한 피부위에서 서식한다. 회화, 사진, 영상이 다 그렇다. 그러나 그 평평한 표면은 물리적인 실체로서의 조건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깊이 없는 깊이, 기이한 환영을 자아내는 피부이자 모든 것이 가능한, 또 다른 차원으로 비약하는 약동이 일어나고 섬광 같은 상상력과 마음이 발화하는 곳이자 망막과 가슴에 동시에 겨냥되어 있다. 정신적 활력이 거닐고 상상력의 보폭이 소요하며 개념적 인식이 지도를 그리는 곳이다. 눈속임으로서의 깊이를 추구했던 전통회화와 깊이를 지우고 오로지 표면에만 강박적으로 집착했던 모더니즘을 지나 오늘날 표면은 모든 실험이 가능하고 어떠한 것도 접속되는 광활한 심연이 되었다. 그러나 최근 그 표면이 단지 스펙타클하거나 망막중심주의의 또 다른 변종으로만 치닫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오늘날 다시 회화가 그 표면위에서 기이한 환영을 신기루처럼 증폭하면서 단지 장식적인 그 어떤 풍경을 만들어내는데 몰두하고 있다는 인상이다. 그러나 이미지가 서식하는 표면은 단지 장식적인, 테크닉이 안착하는 활주로가 아니라 보는 이의 마음과 정신에 울림과 떨림을 안기는 섬세하고 굴곡 심한 판이기도 하다. 그것은 분명 ‘깊은 표면’이다. 형언하기 어려운, 가늠할 수 없는 마음들이 거니는 곳이다. 한 개인의 육체가 모조리 침몰되는 곳이기도 하다.
이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은 다양한 물리적 표면을 장소 삼아 이미지를 얹혀놓거나 흘려보내면서 어떤 깊음을 추구한다. 그것은 시각화나 언어화의 영역에서 온전히 포착하거나 안착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다만 할 수 있다면 얇고 납작한, 너무도 모호하고 불안정한 그 표면에 자기 몸과 마음을 쓰라리게 문질러 깊음에 대한 갈망을 드리울 뿐이다. 그 깊음의 정체는 각자 다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여운처럼 오래 남는 정신적 상흔 같은 것들이다. 이미지란 그렇게 불충분하면서, 부재하면서 살아남아 짧고도 오래 살아남는 상흔을 안기는 일이다. 깊은 표면을 욕망하는 일이다.
권윤희
인간의 정신, 마음과 자연과의 물활론적인 소통을 추구하는 듯 보이는 화면은 그 인간과 자연 사이의 심연을 매개한다. 파도 위와 바람과 물결 같은 자연 현상에 마음이 무늬져 부유한다. 그런가하면 하얀 베개 밑으로, 그 주변으로 옹알거리듯 문자들이 정처 없이 떠돈다. 차마 고정되고 응고되지 못하고 떠도는 마음과 정신을 부득이 호명하는, 기록하는 낱말들은 무심한 표면 위에서 흘러갈 뿐이다. 영상을 받아내는, 출력하는 화면은 그것을 다만 흘려보낸다. 미묘한 신비로움으로 충만한 소리 또한 사라지는 그 속성을 통해 덧없는 효과를 부여한다. 마음은 육체 밖에도 존재한다. 의식의 흐름은 명료하게 표현될 수 없다. 작가는 언어를 통한 인간의 은유적 한계를 자연의 비언어적 현상적 관점으로 확장시킨다. 이성을 넘어서는 비이성적인 심리를 자연현상에 은유하고 있는 것이다. 납작한 모니터의 표면에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의식의 흐름을, 너무 깊은 마음의 유동들을 물처럼 바람처럼 떠보내고 있다.
나경
나경의 사진은 현실 장면의 어느 한 순간을 응고시켰다. 그런데 그 세계 안에 조심스럽게 혹은 기이하게 오버랩 되는 자기 얼굴을 보았다. 그것은 자신의 본 얼굴이자 가면/ 페르소나이다. '나'이자 너무 낯설고 복수화 된 '나', 몸으로부터 이탈되어 떠도는 기이한 '나' 들이다. 순간 우연히 마주친 일상의 모든 공간, 사물의 피부는 자기 자신을 받아주고 비춰준다. 거기에 내가 있다. 나는 거울 속에, 건물의 유리창에, 방 안에 그리고 거리의 이곳저곳에 있다. 그것은 반영의 이미지이자 문득 풍경 안에서 발견해낸, 은닉된 이미지들이기도 하다. 내 눈이, 호흡이 서린 곳에 나는 그렇게 불현듯 나타나고 사라진다. 나와 세계는 분리되고 절연되어 있지 않다. 내가 보고 느끼고 그 안에 있다는 것은 결국 그 세계와 함께 호흡하고 연결되어 있음을 자각하는 일이다. 나는 바로 그 순간순간 명멸되듯이 존재했다 사라지고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한다. 생은 그렇게 한 호흡과 한 숨 사이에, 한 의식과 기억 사이에서만 가까스로 현존한다. 세계는 대상화되지 못하고, 사물화 되지 못하고 내 자신과 심리적으로, 영성적으로 그렇게 얽혀있다. 흑백 톤으로 포박한 세계는 제한된 사각의 평면 안에서 그 너머로 부단히, 맹렬히 빠져나가고자 한다. 이런 속도감은 물리적인 힘이 아니라 눈/마음이 그 대상 앞에서 받은 인상과 감정, 의식과 사고의 신속한 파동을 암시한다. 사실 그런 움직임, 깊음을 사진이 드러낼 수는 없다. 그러나 사진에서 그런 분위기가 느껴지게는 할 수 있다. 느낌의 얼룩들!
도병락
작가는 주변에서 문득 마주한 생명 있는 것들의 스산한 자리와 쇠락하는 자취, 소멸과 잔해의 이미지, 그러면서도 그 안 어디선가 움트는 간절한, 지독한 생의 연속된 자리를 몸으로 따라가 본다. 우드락/스티로폼과 생고무를 가지고 자신의 감동적인 그 마주함을 깊게 파고 자르고 깎고 붙여나가면서 체적화, 실존화 했다. 하찮고 날것으로서의 재료, 고급한 미술적 재료에서 제외된, 상이한 질감과 무게를 지닌 극단적 재료를 자르고 쌓는 한편 파들어가고 덜어내는 일이다. 그것은 너무 많은 노동을 품은 일이자 너무 완강한 살들 사이로 들어가는 일이고 지루하고 반복적이자 단호하고 참혹함이 이는 작업이다. 이러한 제작방법론은 단지 이미지를 재현하거나 상징적으로 처리하거나 외화시키는 일과는 조금 다르다. 몸으로 수행하는 과정 사이에 문득 파고드는 빛과 꽃, 살을 스스로 피워내는 일이다. 정신적 외상, 까닭 모를 슬픔, 너무 깊은 아픔 등을 깊게, 깊게 파들어 간다.
이재헌
화면 위에는 얼굴이 지워진 누군가의 몸들이 흔들린다. 그것은 겨우 포착한 이미지이자 이내 사라져버릴 운명에 처한 존재의 은유다. 무엇인가의 재현이자 이미지에 대한 이미지인 동시에 그 재현으로부터 멀리 달아나 버린 흔적만을 안긴다. 그렇게 남겨진 누군가의 얼굴, 얼굴이면서 얼굴을 상실한 얼굴이다. 생각이나 느낌 따위가 드러난 낯의 상태가 얼굴이라면 사람의 목 위 부분으로 뇌, 눈, 코와 입, 귀가 있는 부분은 머리, 대가리다. 이것은 얼굴이자 머리다. 얼굴이 사회적 기호라면 머리는 진정한 주체(자신)에 속하는 부위다. 표상이 부재하는 기표인 머리는 타자에겐 당연히 낯설고 자신에게조차 낯선 그런 장소다. 이 매혹적인 공간, 장소인 머리를 부재의 상태로 보여주는 그림이다. 그렇게 빈 얼굴/대가리가 말을 지운 자리에 피워내는 상흔의 자리가 깊다.
정세원
‘어린이’는 근대에 태동된 개념이다. 근대 국가는 어린이를 발견해내고 이들을 훈육, 관리하며 국민으로 양성한다. 우리의 유년기는 그렇게 가족과 국가, 사회의 틀 안에서 형성된 흔적, 그로인한 트라우마로 얼룩져있다. 빛바랜 사진 속에 응고된 어린 시절은 무엇이었을까? 정세원은 그 누군가의 유년기를 회상시킨다. 흐리고 눅눅한 먹이 종이 속으로 안타까이 소멸되려 하고 겨우 멈춰선 이미지는 몽롱하다. 얇은 종이의 단면 안으로 스며들어가 말려낸 흔적들은 깊음에 도달하려는 안타까운 제스처다. 사라져버린, 소멸된 아이들, 그 개별적 존재들의 여러 상황과 마음들을 우려내려는 것이다. 어느 한 순간이 마지못해 응고된 상처 같이 말라붙은, 부스럼 같은 흔적이 아이들의 몸짓과 표정과 웃음소리와 재잘거리는 음성을 아련하게 상기시킨다. 퍽이나 감각적인 먹과 붓의 쓰임, 공허한 화면 운영 안에서 그렇게 떠돈다.
조헌
단호한 색면으로 마감된 배경을 뒤로 하고 개를 안고 의자에 앉아있는 인간의 형상이다. 분방하고 결정적인 붓질에 의해 신속하게 자리한 형태와 모호하고 지워진 듯 한 붓질에 의해 드러나지 않는 표정은 암시적이고 상징적이다. 흡사 베이컨 회화에서 만나는 힘과 정서적 깊음이 묻어나는 이 표면은 굴곡심한 내적 동요와 감정의 상황성을 안겨주는 이미지로 응결되어 있다. 지워진, 훼손된 얼굴은 쉽게 표현되지 못하는 마음과 정신의 으깨진 자리를 고정시켜 놓은 자리다.
홍경님
피나무나 잣나무, 은행나무 등의 단단한 목질을 깎고 파들어가 인물을 새겼다. 나무의 속살을 깊게 파내 돌출시킨 이미지다. 그 인물은 현실계의 얼굴을 재현한 것이 아니라 작가의 마음속에 자리한 결정적 이미지다. 작품 하나하나가 시나 짧은 문장을 하나씩 달고 앉아있는 듯하다. 나무의 몸에 새긴 언어의 충동은 이미지로 빠져나왔다. 작가는 글을 쓰고 그 문장에 맞는 이미지를 나무로 깎아 세운 것이다. 문학과 미술, 조각의 여전한 조우! 말을 잃고 내면을 잃고 결국 내밀한 개인이 상실된 동시대 미술에 대한 흥미로운 사례를 던져주는 작업, 내밀한 서사를 열매처럼 달고 있다. 성적 구분이 모호한 이 청순한 얼굴들은 아련한 청춘의 서글픈 생애와 불면의 밤들을 연상시킨다. 우수에 젖은 슬픈 눈이 그것을 증거한다. 아울러 여러 이미지들이 얼굴에 접속되어 또 다른 존재, 이야기로 파생된다. 초현실적 만남, 혹은 예기치 않는 상황, 또는 그 인물의 감정이나 내면 등을 연상시키는 장치다.
박영택(경기대교수, 미술평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