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ace is the place: 김동윤 이정배

9 January - 5 February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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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ss release

우연히 펼쳐든 책의 한 페이지에 '망각을 벗어나는 것, 그런 것이 과거의 화신이다.' 라는 곤파루 젠치쿠의 말이 쓰여 있었다. 책을 덮으니 어느 덧 투산의 붉은 석양이 지고 있다. 누군가도그의 앞에 펼쳐진 석양을 지금의 자신이 바라보는 것 처럼 보고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동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어떻게 받아들이실 지 모르겠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이정배 작가님과 전시를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는 이정배 작가를 직접 만난 기억은 없었다. 다만 한 레지던시 프로그램에서 작품을 접했을 뿐이었다. 전시는 사람이 중요하다. 늘 생각해오던 그 였지만 자신의 예전 작품(Memory)들을 생각해볼 때 이정배 작가의 작품들은 자신과 다른 감정의 깊이를 갖고 있었다. Memory 시리즈는 보편적인 기억에 무게를 두고 있었다. 놀이터, 교차로와 같은 대중적인 곳을 택한 이유도 거기 있었는데, 이정배의 작품은 그와는 달리 일반적인 장소를 택하되 보이지 않는 곳을 보게 했다.   이정배는 약간 피곤한 상태로 까페에 앉았다. 오늘은 전시를 하기로 한 큐레이터와의 미팅이 있는 날이다. 차는 근처 갤러리에 양해를 구하고 주차해놓은 상태라 큰 걱정은 없었다. "김동윤 작가분께는 말씀 들었습니다. 여기 앉을까요?" 큐레이터는 초기 작업이 지금의 작업으로 변화하게 된 과정에 대해 알고 싶어했다. 어떤 작업부터 이야기 해야할 지를 생각하는데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알림벨이 울렸다. "제가 다녀올께요." 큐레이터는 곧 일어났다. 유자차와 우유. 커피전문점에서 시킨 음료라고 보기에는 좀 낯선 조합이라 웃음이 나왔다. 유자차를 한 쪽으로 놓고 가방에서 꺼낸 노트북을 열었다. 초기 작업을 설명할 때 이정배는 소금강에서 그렸던 바위를 떠올렸다. 정말 갖고 싶었던 그 바위는 지금도 자신에게 그 때 그 순간의 바위였다. 그리고 자신의 욕망에 대해 처음 직면하게 되었던 것도 그 순간의 일이었다. 그 감정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게 되기 까지는 3년의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한 개인의 욕망으로 해결되지 않는 사회의 부조리함은 자연스럽게 자본에 대한 비판의식으로 이어졌다. 한지에 프린트 된 사진이 고즈넉한 도시 풍경을 드러내고 있지만 그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개발된 도시 풍경들 사이로 묻혀 있는 자연의 인위적인 풍경이었다. 그래서 그는 사진과 사진 안에 놓여 있는 자연의 조각난 풍경을 부조로 만들어 함께 전시에서 보여주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큐레이터가 말문을 열었다. "만약 아름다운 추억이 있다면 하나만 이야기 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이정배는 뜬금없는 질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질문을 받고 보니 막상 떠오르는 추억이 없었다. "어려우시면, 음.. 인생에서 다시 돌아가고 싶은 순간이라고 생각하시고 말씀해보세요." 큐레이터는 빙그레 웃었다. 그에게 돌아가고 싶은 아름다웠던 순간은 봄의 제비소리와 따뜻하고 환한 아침 햇살,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의 이미지로 남아 있었다. 그 기억에 대해 설명하려는 찰나 전화벨이 울렸다. "잠시만요." 23년 전에 기억했던 투산은 지금의 도시와는 달랐다. 35도를 웃도는 열기는 여전했지만 김동윤은 어쩐지 낯설게만 느껴졌다. 십 대에 기억이 선명했던 아리조나. 그 곳의 작은 도시 투산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다시 여비를 들여 찾아간 것이었으나 이십 여 년의 세월 만큼 이미 도시도 달라져 있었다. 그동안의 작업들이 일반적인 기억을 토대로 해왔다면 이번에는 장소가 작업의중심이었다. 김동윤에게 투산은 한편으로 자신의 어린 시절을 반증하는 곳이기도 했다. 서울에서 대부분의 학창시절을 보냈지만 투산은 처음 갔던 외국의 도시였던 만큼 여러 가지 추억이 많은 곳이었다. 도로변의 거대한 선인장, 붉게 타오르는 태양과 사막은 아직도 강렬하게 남아있었다. 십 대의 파릇한 소년 시절에 기억했던 미국 서부의 풍경을 카메라에 담을 때 마다 그는 예전과 달라진 장소의 미묘한 변화들을 찾아냈다.  투산에서 런던으로 돌아오는 길은 많은 생각들이 교차했다. 문득 M1도로에서 보았던 풍경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M1도로는 런던과 북부 공업지대를 잇는 대표적인 산업도로다. 지금은 산업용으로 거의 쓰이고 있지 않지만 과거 영국의 경제 발전에 주요 공신이었던 길이다. 김동윤은 잘 포장된 도로의 주변 풍경이 좋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갔다가 밋밋하고 공장지대 뿐인 M1도로에 다소 실망했던 기억을 되살렸다. 경제가 발전하고 도시화가 되는 과정은 영국도 다르지 않았다. 이제 그 명성이 잊혀진 M1도로는 어린 시절 추억의 장소에서 낯선 관광지로 변한 투산과도 흡사했다. 장소가 지닌 기억의 본질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김동윤은 그 도로의 풍경을 영상에 담기로 마음 먹었다. "제비가 둥지를 튼 것이 처음이었거든요." 이정배는 짧은 통화를 끝내고 잠시 생각에 잠겨있다가 말문을 열었다. 그는 서울 토박이였다. 열리지 않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과 새소리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했던 순간은 지금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추억이었다. 그 때는 산책도 좋아했다. 자연 속을 묵묵히 걷는 것, 그리고 자연을 직접 마주하는 것이 좋았다. 그에게 자연은 해석에 열려 있고 어떤 법칙도 없이 자유로운, 그러나 그 자체로 이미 온전한 세계였다. 그리고 그 온전함을 자연이 아닌 사람에게 느꼈던 기억이 그 순간이었다. 소유될 수 없는 아름다운 기억이 아파트 사이로 존재하는 자연의 모습과 겹쳤을 때, 그는 사진에 나타난 인위적인 건물에 가려진 자연을 그대로 본떠 조각으로 만들었다. 김동윤이 M1도로의 중간을 지났을 즈음 Doncaster 라는 작은 도시가 보였다. 무의식적으로 핸들을 꺾었다. 런던도 유럽의 여느 도시들 처럼 성당을 기반으로 주거지가 형성되어 있는 데 이 작은 도시도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작고 남루한 성당은 하나 뿐이었고 시골이라 아직 상업화 되지 않은 소박한 곳이었다. 깊어가는 겨울, 작은 마을은 회색빛이었다. 차에서 내리자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옷깃을 스쳤다. 성당은 오래 전 부터 그 자리에 있었을 것이고, 때로는 누군가의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김동윤은 성당을 향해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글 정다경 (갤러리 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