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Y DOT: 정성윤
Past exhibition
Installation Views
Press release
A. 실은 하나의 점으로서 나의 가슴 한복판에 부딪치곤 그대로 아무것도 아니었다.
1. 실은 선으로 두 개의 점이 필요하다. 인연 역시 마찬가지다. 두 개의 가슴이 있어야 가능하다. 하지만 인연은 때때로 끊어진다. 아니 끊어지는 인연이 대부분이다. 남은 게 많은지 끊긴 게 많은지 살면서 만났던 무수한 연들을 생각해 보라. 시인의 말대로 ‘아무것도 아니’게 된 게 너무나 많다. 오히려 여전히 이어진 연들을 골라내는 게 훨씬 쉬울 것이다. 몇 개나 될까. 요즘 똑똑해진 전화기의 새끈한 메신저는 새로운 친구를 추가하라고 닦달하며 친구들을 늘려가지만, 이 가운데 ‘친구’가 얼마나 있을까. 부질없다. 하루에 한 번 이상 연락하는 사람은 고작해야 열 명 내외일 것이며, 이 중에 두 번 이상 메시지를 보내는 사람은 다섯 명 내외이리라. 선이 된 ‘점’은 소멸하고, 가슴의 점들은 퇴각한다. 그리고 사라진다. 그러나 정성윤은 이 사라진 것을 움켜쥐려고 하며, 결국 실패한다. 그는 몰랐을까. 그렇지 않은 게 문제라면 ‘문제’다.
B. 이제야 다시는 메꿀 수 없는 허전한 공간에 / 가슴의 그 무거운 점과 나는 / 가장 가까운 거리를 가지게 되면서
2. 정성윤의 작업궤적을 찬찬히 살펴보면, 두 가지로 구별된다. 첫째 한창 매체예술이 주목을 받을 때 했던 웹아트 작업, 둘째 이후 웹아트를 뒤로 한 채 현재 작업하는 기계설치 작업. 언뜻 보기에는 두 가지 작업계열은 완전히 구별된다. 전자는 한창 하이테크로 각광을 받으며 태어난 새로운 예술형식이었고, 후자는 전통적 로우테크로 제작된 반자동 기계장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물질적 형태 너머의 일관성은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매체가 전달하는 메시지며, 현재의 <무거운 점> 역시 마찬가지다. 물론, 이전의 기계설치 작업과 <무거운 점>이 똑같지는 않다. 형태만 본다면 거의 동일한 구조를 띠고 있는 것 같지만, 몇 가지 중요한 변화를 모색했다. 여기서 등장하는 게 바로 앞서 인용한 박양균의 ‘입상’이다. 정성윤은 이 시에서 무엇인가 실마리를 찾았던 것일까. 흥미롭게도 박양균의 ‘입상’에서 핵심적인 은유는 선(실)과 점과 가슴(공간)과 입상 등 조형적 형상들이다. 당연히 우연의 일치가 아니며, <무거운 점>을 ‘해석’하는 직접적 단서로 기능한다. 그러면 <입상>이 전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C. 그건 움직일 수 없는 / 또한 잇닿을 수 없는 입상이 되고 만 것이었다.
3. 언뜻 보기에 박양균의 <입상>은 난해하며, 실제로도 난해시로 불린다.(황현산) 하지만 조형적 원리에 따라 생각하면, 의외로 ‘손쉽게’ 해명된다. ‘점―선―공간―입상’, 이 공간적 요소의 확장을 인간관계의 과정으로 등치시키는 것. 우선, 점은 한 개인을 뜻하며, 현대사회에서 개인은 고립된 섬이다. 하지만, 온전히 고립된 것은 아니며, 언제나 ‘관계’가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선이다. 이 은유를 기본으로 시인은 논리보다 ‘변용’을 꾀한다. 시가 기하학이 아닌 만큼 당연한 이치리라. 시인의 출발점은 점이 아니라 선이다. ‘실(선)이 가슴(공간) 복판에 부딪힌다’는 것은 인연의 성립을 뜻한다. 하지만, 이내 연은 끊어진다. 시인은 흥미롭게도 끊어진 연을 ‘점’으로 형상화하면서, ‘가장 가까운 거리’라고 역설적으로 표현한다. 하지만, 가장 가까운 거리는 사라진 거리요, 잃어버린 관계의 다른 말일 따름이다. 물론, 그렇다고 완전히 소멸된 것도 아니다. 기억 속 어딘가에 여전히 남아있다. 이것을 시인은 입상으로 형상화한다. 실의 끝을 꼭지점으로 간주하고, 가슴이 원형이라면 원뿔 형태가 구성될 것이다. 제목 그대로 입상이 건립되는 것. 여기서 시인의 통찰력이 드러난다. “그리고 그것은 내 곁에서 도는 것이 아니라 / 내가 누구도 없이 돌고 있는 것이었다.” 입상이 회전한다는 것, 그런데 혼자서 돌고 있다는 것, 그게 바로 정성윤이 보는 것이자 만들려 하는 <무거운 점>이며, 시적 은유들은 작업에서 온전한 형상을 찾는다.
D. 그것은 내 곁에 와 정지하고 마는 것이다.
4. <무거운 점>은 2009년부터 시작한 수동형 기계설치 작업과 형태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단단한 금속의 외피, (비교적) 정밀한 기계장치, 타인의 힘이 필요한 수동식 대화구조. 초기에 웹아트 작업에서 전달했던 메시지가 가벼웠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정성윤은 기계설치 작업에서 메시지의 양을 줄이는 동시에 단단하게 구축하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2012년에 제작된 와 는 메시지가 딱 하나뿐이다. 게다가 관객이 메시지를 수신하기 위해서는 관객이 직접 작동(운동)해야 한다. 즉 자기 몸을 써서 ‘대화’를 해야 했다. 대화(상호작용)라고는 하지만, 딱히 친절한 작업은 아니다. 메시지가 흐르다 못해 난무하는 미디어시대에, 단 한 마디의 말을 전달(완성)하기 위해서 온몸을 직접 쓰는 모습은 철이 지나도 한참 지나가 보인다. 그런데, 이번의 작업은 전보다도 불친절해졌다. <무거운 점>의 기본적인 골격은 전작과 대체로 비슷하다. 간결한 금속의 구조는 여전하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두 가지가 빠졌다. 우선, ‘메시지’가 사라졌다. 대체로 기계조립물 상단에 위치했던 메시지를 뒤로 한 채 등장한 것은 까만 점이다. 메시지는 단단해지다 못해 텍스트의 극단으로 축소된다. 빠진 것은 그뿐만이 아니다. 이전 작업은 메시지를 수신하기 위해서 관객이 손이나 몸을 직접 써야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럴 만한 여지가 없다. 작업은 좌우의 비대칭적 추를 통해서 ‘스스로’ 균형을 흔들흔들 잡는다. 관객이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다. 한마디로, ‘운동’이 빠진 것이다. 고립된 섬 같다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E. 그건 없는 고향처럼 그리워지는 것이었으며 / 그와 나는 또한 그러한 거리만은 언제나 보존할 수 있을 것만 같었다
5. 달라진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관객으로서는 <무거운 점>에 다가가는 것조차 쉽지 않다. 2분에 한바퀴 회전하는 막대가 <무거운 점>으로 가는 길을 빡빡히 막아섰기 때문이다. 그러니, 관객은 회전막대가 순순히 길을 터주기 전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다. 대화는커녕 말조차 붙이기 쉽지 않은 셈이다. 그의 침묵은 전보다 깊어진다. 어떻게 보면, 관객의 운동을 요구했던 것은 전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의미가 다르다. 전에는 의미를 ‘조립’하기 위해서 운동이 필요했지만, 지금은 의미에 ‘접근’하기 위해서 운동을 해야 한다. 그러나, 이 운동조차 운동이 아니다. 멈춰서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정성윤이 대화하는 상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바로 <입상>이며, 대화의 결과가 <무거운 점>이기도 하다. 그것들 역시 인연이란 뜻이다. 그리고, 이 시를 통해서 정성윤이 떠올린 여러 기억들 역시 대화의 상대였을 테고. 하지만, 이 역시 ‘하나의 점으로서 부딪히곤 아무것도 아니게’ 될 것이며 언젠가 끊어질 연이 아닐까. ‘무거운 점’이 ‘마침표’라면, 그것은 새로운 문장을 기다리는 점일 것이다
_김상우(미술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