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ght & Left: 윤상윤

28 September - 23 October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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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윤의 ‘right & left’전은 좌우 대칭의 유기체에게 가장 기본적인 질서 감각을 부여하는 오른쪽/왼쪽이라는 공간적 위상을 통해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를 다룬다. 의식/무의식 이라는 심리학적 관계는 예술에 있어 기본적인 관계인 이성/직관과 직결된다. 소통 방식으로서 예술은 기본적으로는 언어, 즉 이성에 속하지만 다른 어떤 언어보다도 직관의 힘을 용인하고 요구한다. 직관은 이성이라는 형식을 통해 구현되며, 원초적 질료로부터 지속적으로 에너지를 공급받는다. 언어란 차이의 체계일 뿐,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언어가 없다면 실체는 결코 표현을 획득하지 못한다. 유명 철학자의 언명을 흉내 내자면, 언어 없는 실체는 맹목적이고, 실체 없는 언어는 공허하다. 그러나 인간이 자연을 정복해 온 만큼 언어의 힘은 더 강력해지고 있으며, 세상은 온통 코드로 덮여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다른 미디어와 달리 신체적 감각에 깊이 의존하는 회화는 여전히 실체와 관계를 맺고 있다. 
전시부제의 한편을 이루는 ‘right’의 사전적 정의는 ‘오른쪽의, 오른 손의’ 외에, ‘옳은, 정당한, 정의로운, 공정한, 선량한, 정확한, 타당한, 정상적인, 제정신인, 좋은, 질서정연한, 표면의, 정면의, 안성맞춤의, 적절한, 진정한....’ 등으로 열거될 수 있다. ‘left’란 정확히 그 반대편에 있다. 오른쪽/왼쪽은 위치관계 이외에 다른 점이 없는 짝패이지만, 인간 사회 속에서 차이는 상징적 구별을 파생시킨다. 윤상윤의 작품에서 좌우라는 수평적 차이는 상하라는 수직적 차이로 전이된다. 왼쪽은 무의식, 오른쪽은 의식에 해당된다. 이번 전시에서 떠오르는 대로 손가는 대로, 그리고 수정 없이 한 번에 그려진 드로잉들이 무의식이 분출된 흔적들이라면, 이드/에고/수퍼 에고라는 정신분석의 3단 구조를 떠올리는 구성의 회화는 다소간 의식적이다. 그러나 의식 역시 무의식과의 역학관계 속에 있다. 왼손잡이였다가 ‘바르게’ 교정을 받은 작가에게, 회화 작업과 달리 왼손으로 하는 드로잉은 교육에 의해 후천적으로 습득된 기교를 배제하게 한다. 
왼손으로 그리기는 의식에 의해 억압되어 잊혀 진 것들을 호출한다. 여러 크기와 형태의 액자에 하나씩 담겨 있는 드로잉들은 상호 연관관계를 파악하기 힘들고, 제목과 이미지 간의 관계도 멀찍이 떨어져 있으며, 그 출처 또한 불분명하지만 작가에게는 무의식의 속기록 같은 현실성과 진실성을 가진다. 이 단편들에는 연극의 한 장면, 또는 우화나 동화, 소설, 일상과 사회적 관례에 대한 언급 등이 담겨있다. 그것들은 영화감상이나 독서, 뉴스 등에서 영감을 받은 것일지 모르지만, 원래의 내용과 형식으로 환원될 수 없을 만큼 변형되었다. 그것들은 현실의 한 부분이 작가의 감성을 건드려, 무의식의 심연으로 건져 올려 진 수수께끼 같은 단편들이다. 이 세상에는 모호하지만 절박하고, 분명하지만 진부한 것들이 있다. 매혹적으로 다가오는 전자의 세계가 예술의 진정한 터전이다. 윤상윤의 작품에서 회화는 드로잉에 비해 일상의 장면들과 좀 더 가깝다. 그러나 사진과 상상 등, 서로 다른 차원이 짜깁기 된 장면은 환상과 광기의 무대인 드로잉만큼이나 부조리하다. 
드로잉과 마찬가지로 회화도 무대이다. 좀 더 의식적으로 짜여 진 무대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많은 회화의 기저 면에 깔린 물이다. 그다음 층에는 상위에 배치된 어떤 상징에 관심이 쏠려있는 군중들이다. 정신분석학적 모델과 비유하자면 물은 이드, 군중은 에고, 최상층부는 수퍼 에고를 가리킨다. 이러한 이론적 모델과의 중첩에도 불구하고, 언뜻 일상의 한 장면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은 세부분의 구조가 질적 차이를 가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것은 구별되는 실존의 세 평면일 뿐이다. 실내인지 외인지가 모호한 공간 속에 종종 등장하는 나무들은 지하-지상-천상 등 세 가지 차원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상징처럼 보인다. 우선 무의식을 상징하는 물은 공포 또는 신비의 기원인 원초적 현실계가 아니라, 산란하는 오후의 햇살을 가득 받고 있는 풀장의 물처럼 얇게 찰랑거린다. 그것은 물에 투사된 인류학적 상상과 사뭇 거리가 있는, 이를테면 무늬만 물이다. 그것은 이질적인 무엇이 튀어나오는 원초적 무질서의 저수지가 아니라, 상식이 지배하는 지상의 질서를 반쯤은 투명하게 반영한다. 그 안에 무엇인가 들어 있다면 금 새 그 정체가 드러날 것 같다. 
그다음 층인 에고 부분, 즉 말 그대로 나뉘어질 수 없는 개인(individual)의 영역은 관심을 공유하는 일군의 집단으로 나타난다. 작가는 영국에 유학 가 있는 동안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과 접하게 되는데, 그가 아르바이트나 수업을 통해 만났던 일군의 집단들은 각자의 영역이 있었다. 영역은 그 안에 속한 이를 보호해주지만, 그 외의 사람에게는 배타적인 틀로 작동한다. 작가는 이방인에게는 각기 다르게 다가오는 집단 정체성에 원활히 속해야만 하는 과제에 직면한다. 사회 속의 개인은 독자적인 의미의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기 힘들다. 정체성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 놓인 가변적인 것이다. 현대사회는 개인을 그 누구와도 대체될 수 있도록 압력을 행사한다. 그들은 대개 익명의 생산자이거나 소비자로 규정된다. 모여 있는 군중들로 나타나는 에고 부분은 타자를 내투사(introjection)함으로서 다른 사람들과 동일시(identification)하는 과정이 선명하다. 특히 낯선 사회에 가서 집단과 동일시될 수 없으면 생존할 수 없다는 점에서, 정체성 확보는 긴급한 권력의 문제이다. 
크리스테바는 [공포의 권력]에서 정/부정의 체계를 담지 할 수 있는 주관성, 또는 사회적 유형 등을 재현하는 주관적인 구조화 과정을 언급한다. 그러나 정/부정의 대립은 절대적인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대립을 통해 공고한 동일성이 구축된다. 지배적 사회는 우연의 편린들을 보편과 필연으로 강요한다. 그것이 개성에 대한 우상숭배에 가까운 현대의 열망에도 불구하고, 자아나 주체에 대해 우리가 불편함을 느끼는 이유이다. 탈인간주의까지 주장하는 현대예술은 상상적 자아와 상징적 주체의 틀을 깨기 위한 몸부림으로 점철되어 있다. 고정된 주체를 흐트러트리는 윤상윤의 드로잉은 타자로서의 자신이 복귀하는 무대이다. 마지막으로 수퍼 에고 부분은 미술대학의 학생이었던 그에게 흔히 아름다움의 모델로 설정된다. 그것들은 사슴, 백조, 학, 모델이 될 만한 외모 사람, 작품, 물건 등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한 조각의 아름다움이나 진실에는 잔인함이 깃들여 있듯이, 그 기원에는 작가의 트라우마가 있다. 
고등학교 때 컨닝을 하다 발각되어 홀로 책상 위에 앉는 벌을 서게 된 그에게 최상위에 놓여있는 모델이란 사회의 상징적 질서가 규정하는 옳고 그름의 범례이다. 개인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오직 그것에 의해 규정될 뿐인 상징적 질서는 폭력적이다. 동시에 나 이전에 존재하며 주체를 구조화하는 이 질서는 신성하게 다가온다. 수퍼 에고는 억압적이면서도 초월적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서 수퍼 에고의 모델은 구체적 물질성이나 육체성을 휘발시키고 반투명하게 나타나기도 한다. 그것은 사물 그 자체는 아니지만, 그 형상을 본떠서 만들어야 하는 플라톤적인 이데아의 세계일지도 모른다. 지상세계는 이러한 이상적 원형으로부터 파생된 모조들(simulacrum)로 가득하다. 그러나 윤상윤의 작품에서 집단화된 개인, 또는 군중의 관심사인 원형적 모델은 그것들이 깔고 있는 물처럼 얇고 일상과 잘 구별되지도 않는다. 그것들은 때로 단 위에서 내려와 있고 기저 층을 이루는 수면 위에 직접 떠 있기도 한다. 대개 한 칸의 단으로만 구별된 공간적 배치는 수직적 위계 구조를 이미 전복한다. 
그것은 주변에서 흔히 발견될 수 있는 자연, 인간, 사물일 수 있다. 그것들은 좌/우처럼 공간적 차이만을 가진다. 세 가지 차원은 상호관계 속에서 한데 얽혀있다. 윤상윤의 그림은 그 세 가지 차원이 주체라는 장에서 서로 만나 관계망을 이룬다. 그러나 정신분석학이 구별하는 삼계의 차이도 분명히 새겨있다. 흐르기 보다는 고여 있는 것에 가까운 물은 무의식처럼 시간성을 가지지 않는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에서 무의식에서 이루어지는 과정은 무시간적이라고 말한다. 그 과정들은 시간적인 순서에 따라 일어나는 것도 아니며, 시간이 경과에 따라 변화되지도 않는다는 뜻이다. 무의식은 의식이나 초자아와 달리, 구조와 체계를 가지고 있지 않다. 빛을 비롯한 주변의 환경에 따라 복잡하게 일렁이는 물결은 종점을 가지지 않은 채 영원히 유동하고 있을 뿐이다. 연속성을 잃은 채 어지럽게 산란하는 물결은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 놓여 진 분열과 간극을 나타낸다. 
그러나 잠재성과 현실성이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수시로 자리를 바꾼다. 그의 작품에서 무의식은 심층을 이루고 있지 않으며, 어떤 현실의 깊은 원인이 된다기보다는 현실과 나란히 존재하면서 현실과 함께 작동한다. 그것은 거울, 그리고 그것의 현대적 방식인 이런저런 차원의 인터페이스처럼 어디에나 편재한다. 얇은 물이 보여주는 어지러운 일렁임은 고정된 경계를 무너뜨린다. 유동하는 거울은 현상을 가상화한다. 수직적 위계를 가지는 구조 또한 약화된다. 그것은 서로를 반영하는 열린 구조를 이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상윤의 그림에 약한 구별 내지 구조가 존재하는 이유는, 예술이라는 것이 원초적 질료(무질서)와 역학관계를 가지는 형식(언어)라는 것에 있다. 지배적 제도는 역사적으로 정립되어온 형식을 교본화 함으로서 예술의 이질성을 순화시킨다. 교육과 학습의 대상이 아닌 것을 코드로 환원하려는 움직임에는 왠지 예술에 대한 사회의 복수 같은 것이 느껴진다. 
아무리 코드화가 촘촘히 진행되어 왔어도, 사회인과 예술인 사이에는 아직도 동일시하기 힘든 간극이 있다. 예술의 자유가 사회 쪽으로 전염되어야 하지 그 반대여서는 곤란하다. 오늘날 작가들이 이름도 논리도 시간성도 없는 무의식에 주목하는 것은 예술을 사회의 규칙에 따라 길들이고 관리하려는 압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이다. 무의식은 사회적 규칙을 따라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 예술을 통해 활성화된다. 여기에 결코 가두어질 수 없는 예술의 혁명적인 힘이 존재한다. 작품의 새로움 또는 이질성은 무의식을 의식의 차원에 틔워 놓는 것에 있다. 무의식은 무시간적이고 무정형적이지만 마그마처럼 들끊는 강력한 에너지원이며, 이 강력한 실재는 ‘상상과 상징의 기반을 이루는 물질적 기질(질료)’(라깡)이다. 이 물질적 기질의 흔적들이 드로잉에서는 더욱 두드러진다. 이 원초적 질료로부터 의미와 주체가 생성된다. 그의 그림은 무의식처럼 고여 있는 물을 담고 있는 원초적 그릇이다. 
그것은 무의식과 의식의 미동을 지진계처럼 포착한다. 의식은 겉으로의 질서와 달리 분열과 간극으로 점철되어 있으며, 무의식은 언제라도 그 틈으로 분출될 기회를 노린다. 그러나 그 역시 잘 조절되지 않으면 무용한 발산이나 누수로 곧 고갈되고 말 것이다. 윤상윤의 작품에서 수퍼 에고의 영역에 자리한 상징적 질서는 사회가 부여하는 의미의 영역이다. 이 질서가 없다면 고차원적인 소통양식이라 할 수 있는 예술은 커녕 기본적인 지각과 의미전달, 그리고 주체의 자기 유지조차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 질서에만 따른다면, 새로움과 이질성은 불가능하다. 무의식은 정립되어 있는 존재의 틀과 고정된 의미를 변형 시키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상식을 준수하면서 억압적 질서를 재생산할 따름인 일반인과도 다르게, 그리고 언어자체를 잃어버려 광기와 무정부 상태에 빠진 광인과도 다르게, 의식과 무의식이라는 두 가지 고삐를 함께 쥐고 있다. 단지 서있거나 걷는 것을 넘어서, 날아올라야 하는 예술은 좌우의 날갯짓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선영(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