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easons: 칼오마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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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오마슨은 조용히 앉아 있다가 입을 열었다. 아이슬란드에서 커피는 집에 손님이 찾아왔을 때 내놓는 첫번째 음료로 보편적인 접대 문화에 속한다. 여성 보다는 남성에게 더 익숙한 음료다. 처음 아이슬란드의 거리에서 퍼포먼스를 펼쳤을 때 그는 자신이 공사현장에서 일했던 경험을 되살렸다. 인부들이 휴식을 취하는 시간, 주위에 있던 페트병이나 직접 만든 컵에 마시곤 했던 커피를 기억해내고, 어느 가을날, 그들과 함께 했던 경험을 길거리의 사람들과 나누기로 결심했다. 칼 오마슨이 아이슬란드에서 행했던 첫번째 커피 퍼포먼스 'We're both imagining things(2009)' 가 시사하는 바는 명료하다. 사회적 위치나 부에 상관없이 우리는 일상의 소소한 일이나 미래의 어떤 것을 상상한다. 칼 오마슨은 우리가 상상하는 순간을 단순한 휴식, 사람들에게 가장 익숙한 커피 한 잔을 마시는 것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자신이 직접 다듬은 페트병이나 통조림 캔으로 만든 컵에 커피를 담고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며 함께 하는 퍼포먼스는 정체성을 바꾸는 것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사회라는 하나의 공동체 조직 안에서 예술가이면서 버스 운전자로, 혹은 누군가를 가르치는 교사나 인부로 살아가는 것은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 커피가 담긴 컵이 까페에서 사용되는 머그나 회사의 종이컵, 빈 통조림 캔이어도 그 안에 담긴 커피는 다를 바 없는 것 처럼 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칼이 한국에 도착했던 2010년은 커피가 까페 중심의 문화로 대중화되어, 커피를 즐기는 이들이 보다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었고 커피 문화가 추구하는 스타일이 유행에 민감했다. 아이슬란드 보다 가격도 꽤 비싼 상태였다. 그것은 칼에게 일종의 문화적 충격으로 다가왔다. 칼 오마슨은 잠시 말을 멈추고 건네받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따라서 이번에 한국에서 행해질 ‘We’re both imagining things’ 퍼포먼스는 나름의 의미가 있을 것이라며 살짝 웃었다.
전시될 작품을 결정하는 데 고민했던 작품은 예상과 달리 가장 처음 만들어진 'Roots(2005)'였다. Roots는 아무도 본 적이 없었던 칼의 첫번째 퍼포먼스였다. 칼 오마슨은 누군가에게 잘못 배달된 편지를 한동안 받게 되었는데 주소와 이름이 다른 편지들이 쌓여가는 것을 지켜보던 어느 날, 칼은 봉투 위에 씌여진 주소로 직접 찾아가보기로 마음 먹었다. 늦은 겨울의 날씨는 스산했고 마침 폭풍우도 몰아칠 기세여서 옷깃을 단단히 여미고 가방엔 간단한 필기도구와 카메라, 잘못 배달된 편지 만을 넣고 한번도 가보지 않은 장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칼은 주소지 근처에 도착해 그 곳에서 하룻밤 게스트 하우스에 머물렀다. 그는 완전한 이방인 이었다. 목적을 가지고 한 장소에 도착했으나 그 목적은 처음부터 칼에게 주어진 과제는 아니었다. 잘못 배달된 편지는 그에게 짧은 여행의 기회를 제공해 주었을 뿐이다. 하룻밤 묵었던 숙소, 기차역의 차디찬 습기와 폭풍우. 그리고 낯선 이들과의 만남은 의도된 바 없이 하나의 생각만으로 만들어진 경험이었고 칼은 온전히 그것을 받아들였다. 게스트 하우스에 묵는 동안 기록했던 짧은 노트와 무의식적으로 찍은 사진들은 그 이후 칼 오마슨이 가진 퍼포먼스 성격의 작업 형식을 결정짓는 가장 기본적인 작품이 되었다.
앞서 제시한 즉흥적으로 이루어진 퍼포먼스들에 반해 'Yellow(2013)'는 비교적 오래 전 부터 아이디어로만 존재했던 작품이었다. 투명한 색상의 아크릴 판과 바퀴가 달린 구조로 이루어진 이 작품을 구상했던 때는 커피 퍼포먼스가 행해지기 이전인 2008년 여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칼 오마슨은 그의 핏줄인 새로운 생명의 탄생과 할아버지의 죽음을 동시에 마주하게 된다. 할아버지가 입원한 병동으로 찾아간 그는 문득 병원 안으로 들어온 눈부신 햇살을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다고 이야기하며 삶과 죽음이 교차했던 우연한 경험을 잠시 떠올렸다. 병실의 창문으로 들어온 햇빛은 창백한 병원 안을 비추고 있었는 데 무채색인 가구들이나 벽과는 달리 커텐은 유난히 따뜻한 주황색이었다. 그 뒤로 옐로우라는 설치작품을 구상하게 되었다고 담담히 털어놓았다. 병원 안의 모든 가구들은 이동하기 용이하도록 바퀴가 달려있다. 옐로우 작업에도 역시 바퀴가 달려있다. 커피와 편지를 비롯해 일상을 구성하는 이러한 세세한 정보는 칼에게 좋은 재료가 되는 것 처럼 보였다. 병실 커텐의 주황색이 인상깊었다면 왜 노란색이었냐는 질문에 햇빛은 노란색에 가깝다고 간단히 대답했다. 여름의 아이슬란드는 백야다. 칼은 백야의 어슴프레한 햇빛은 차가운 회색과도 비슷하다고 말했다. 그가 문득 시선이 멈추었던 병실의 주황색 커텐은 어쩌면 그가 보고 싶었던 햇빛이 아니었을까. 생각하는 동안 그는 종이와 연필을 꺼내 백야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사각거리는 연필소리와 함께 지구, 태양, 그리고 대기권에 관한 그림을 완성한 칼은 종이를 내밀었다. 칼이 그린 지구는 2009년 이른 봄, 독일에서 이루어진 'Duration of My Chemical (2009)' 시리즈의 창틀 앞에 놓였던 동그랗게 오린 종이를 연상케 했다. Duration of My Chemical은 3주의 짧은 레지던시 프로그램 안에서 행해진 작업이다. 레지던시 측으로 부터 갑작스러운 통보를 받고 떠나게 된 터라 화구를 챙길만한 여유가 없었다고 칼은 이야기 했다. 가장 기본적인 것들만 챙기고, 나머지 재료는 현지에서 구했는 데 작은 마켓 밖에 없는 시골 동네라 구할 수 있었던 것은 종이와 약간의 수채물감 뿐이었다. 그 중 ‘Flesh Pink(살색)’을 선택해서 종이를 칠하고 마르도록 놔두니 얇은 종이는 이내 주름이 가고 살짝 형태가 변형되었다. 종이 위에 칠한 색은 거의 투명하게 변해 있었다. 종이를 원형으로 잘랐던 건 특별한 의도는 없었다. 반 쯤 남은 커피를 들여다보다가 칼은 나직하게 이야기했다. 늘 그랬듯이 무의식적으로 움직였고 수채물감으로 칠한 원형의 가벼운 종이를 레지던시 중 머물렀던 고성의 곳곳에 놓고 사진으로 기록했다. 칼은 의도치 않은 곳에서 오는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작업에 반영했다.
한 사람의 삶과 작업은 사계절의 자연스러운 변화가 찾아오듯 소멸과 생성을 거치며 그 길을 함께 간다.
네덜란드에 잠시 머물렀던 2005년 부터 2013년의 최근 작업들을 통해 칼 오마슨은 자신 만의 사계절을 지나왔다.
올 해도 어김없이 새로운 계절이 시작되고 있다. 칼 오마슨이 어느 계절을 향해 가는 지 천천히 지켜보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갤러리조선 정다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