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were, you are: 송지윤 윤상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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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익숙하게 다니는 버스정류장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들은 자신의 발걸음이 언제나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길가에 붙여진 찬란한 홍보물은 어떤 것은 이미 날짜가 지난 것이고 또 다른 것은 다가오는 이벤트다. 거리는 사람들로 붐비고 조경계획에 따라 심어진 가로수들은 가지런히 일렬로 서있다. 여행 상품을 안내하는 관광포스터나 인터넷에 떠도는 휴양지의 낯익은 이미지도 매 년 여행시즌에 맞춰 우리에게 도달한다. 반복되는 일상 안에서 우리가 문득 발견하게 되는 풍경이란 아이러니하게도 익숙하지만 낯설다. 마치 어느 날의 오래된 꿈처럼 나른하게 기억될 뿐이다.
그러나 송지윤 작가가 풍경에서 보았던 것은 단순한 환영이 아니다. 그는 휴양지의 광고물에서 나온 이미지와 도시에서 볼 수 있는 시각적인 기호들을 재조립해 그 만의 독창적인 풍경을 만들어낸다. 작가는 우주처럼 실제로 존재하지만 실재 같지 않은 풍경을 읽는다. 태양이 떠오르는 하늘은 부드러운 녹색으로 물들고 새벽의 별자리는 작가가 만들어낸 도식 위에 놓여있다. 그의 회화에서 흥미로운 점은 이미지를 창조하는 방식이 지닌 추상성이다. 그리고 그가 선택한 방식은 여정에 가깝다. 따라서 송지윤 작가가 그려내는 풍경의 장소성은 정해진 시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오랫동안 도시 풍경의 언저리로부터 채집한 색깔이나 형태를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흔한 관광엽서나 도시의 홍보물을 가볍게 지나치지 않고 그 이미지와 기호들이 지닌 섬세한 언어에 귀를 기울이는 작가의 태도는 주제에 관해 진지한 접근을 하는 이들이 그러하듯 낯익은 이미지들의 재현보다 그 안에 숨어있을지 모르는 진정한 이상향을 끊임없이 탐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의 풍경에 대한 순수한 접근 방식은 직접적인 내러티브가 없는 만큼 환상적이다. 그래서 그가 그리는 풍경은 주어진 시간을 초월할 수 있다. 작가에게 내러티브란 단지 조형적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 윤상윤 작가의 회화는 개인적 경험이나 기억이 그의 풍경으로 걸어 들어가는 단초가 된다. 그의 작업은 시간과 공간이 섞인 듯 한 화면구성과 삼위일체 방식(물 아래, 물 위, 단상 위)을 보여주는 데, 결과로서의 이미지를 제시하기 보다 풍경이 완성되는 과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특정한 구성에서 자유로운 송지윤 작가와는 달리 윤상윤 작가의 풍경에는 의도적으로 개인과 그룹이 등장한다. 주변의 풍경도 어딘가 익숙하지만 낯설다. 자전거들이 가득차 있거나, 사람들은 물 속에 앉아있다. 사람들은 단체로 한 개인을 바라보거나 혹은 사슴처럼 동물로 은유되기도 한다. 단상 위에 있는 개인은 가운데에서 무언가 외치고, 노래하는데 그것은 그들에게 큰 관심사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작가의 관점은 가운데 홀로 존재하는 개인에게도, 그를 외면하는 주변의 사람들에게도 잔인하지 않다. 아침을 향하는 어스름한 새벽처럼 언제나 푸른기가 감도는 그의 화폭에는 사회의 부조리함과 권력구조를 비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간을 대하는 아련한 서정미가 남아있다. 작가는 풍경의 바깥에서 인간적인 시선으로 그가 만든 풍경을 바라보고 있다. 기존의 통념을 무력화시키는 모호한 풍경이 선사하는 자유로움에 대해 그는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예상치 못한 시행착오들이 일어날 때, 삶은 때로 익숙하지 않은 풍경으로 우리 앞에 펼쳐진다. 삶은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며 변화하고, 우리는 지금 그 과정을 겸허히 바라보는 두 가지의 풍경 안에 있다. 송지윤 작가의 진지한 여정이 주는 가능성과 윤상윤 작가의 따뜻한 시선을 믿는다면 우리가 원하는 풍경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그동안 우리의 미래를 너무 오래 잊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갤러리조선 정다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