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ndscape-alized Body: 장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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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양희의 작품 속 얼굴들은 개인의 특성을 변별 화 할 수 있는 요소가 제거되어 있다.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들 모두가 소재가 되지만 익명성은 유지된다. 한 개인의 얼굴을 하나하나 잘 보이도록 라이트박스 안에 설치했음에도 불구하고, 눈 부분은 생략되어있고 그 나마의 형태도 다양한 패턴의 중첩에 의해 흐릿해져 있다. 이전 작품에서, 여러 개의 라이트 박스 안에 눈 없는 얼굴 넣어서 그리드 식으로 붙여 놓은 [Anonymous Face](2007)나 같은 크기의 라이트 박스를 벽에 일정 간격으로 죽 배열한 [Anonymous Face](2010)에서 어떠한 이에게도 특별한 방점이 찍혀 있지 않는 익명성이 발견된다. 이러한 구성에서 누구와 누구의 자리를 바꿔놓는다 한들, 누군가를 뺀다 한들, 그 변화를 알아채기 힘들 것이다. 요즘 작업에는 눈도 나오고, 얼굴을 넘어서 몸까지 등장하지만, 그러한 익명성이 약화된 것은 아니다.
이번 전시에서 분리된 판 8개를 결합시킨 거대한 초상은 어느 작품보다도 원형에 충실한 짜 맞추기이며, 증명사진과 다를 바 없는 인덱스로서의 특징을 가지지만, CCTV에 찍힌 범죄자 사진 같은 흐릿함이 특징적이다. 자르고 다시 붙이는 과정 속에서 개별성은 휘발되어 버린다. 장양희의 작품에서 구성은 해체의, 해체는 구성의 이면이다. 얼굴을 세로로 쪼개 긴 라이트 박스 안에 담아서 간격을 두고 배치한 이전 작품 [Anonymous Face](2010)나, 다른 크기의 라이트 박스 안에 얼굴 부분들을 담아 배치한 [Anonymous Face](2007)에서, 박스와 박스 사이의 간극은 다른 부분들과의 교체 가능성을 내포한다. 그것들은 말 그대로 가변설치 작품이다. ‘풍경화 된 신체’라는 이 전시의 부제는 그녀의 작품 속에 관철되어 온 얼굴의 익명성을 몸까지 확장시킨다. 얼굴은 몸의 핵심이고, 몸은 얼굴의 연장이라면, 몸으로의 전환은 익명성을 더욱 강화시키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몸은 얼굴 화 된다.
에로틱한 관계를 익명적인 것으로 보는 레비나스가 말하듯이, 몸 전체가 얼굴로 표현될 수 있다. 이번 전시의 몸 풍경(bodyscape)과 이전 작품들의 초상들에는 익명성이라는 연결 고리가 여전히 존재한다. 시각 예술의 관습상, 작품 한가운데 나오는 형상은 대부분 인물을 암시하며, 그 출발은 자화상일 경우가 많다. 2005년 장양희의 첫 개인전 ‘나를 그리다’부터 초상과 라이트 박스의 결합이 시작 되었다. 그녀의 작업에서 나는 불특정 다수이며, 그 역 또한 성립된다. 얼굴 또는 몸의 익명성은 한명이 여러 부분으로, 또는 여러 명이 한 몸처럼 조합되는 설치의 가변성을 낳았다. 부분들 사이의 간극은 설치방식에 따라 다양하지만, 완전한 별개의 조각들로 흩어지지는 않는다. 장양희의 작품에서 몸은 여전히 작품의 응집력을 유지하는 기준이다. 작품 [Anonymous Face](2010)에서 코와 입은 각각의 박스에 담겨있지만, 자연스럽게 코는 입 위에 설치된다. 뒤집혀 있는 경우도 없다.
라이트 박스가 동원된 3차원 화 된 이미지에서 수직, 수평의 차원 모두에서 일어나는 계열화는 대상의 명확성을 교란시킨다. 투명한 평면들의 중첩에서 신체의 일부가 아닌 추상적 형상들은, 대부분 사진에서 출발한 평면적 인물에 깊이의 환영을 만든다. 여기에서 유기물과 무기물 간의 질적 차이는 고려되지 않는다. 그것들을 화석처럼 켜켜이 쌓이면서 서로 구별될 수 없는 새로운 실체를 만들어간다. 또한 그 깊이는 외면에 반대되는 내면이 아니라, 가면 속의 가면처럼 무수한 외면들로 이루어진 깊이이다. 그것들은 ‘내재성의 장’을 이루지만, ‘자아의 내부에 있지 않을뿐더러, 비(非)자아에서 유래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자아를 인식하지 않는 절대적인 바깥’(들뢰즈와 가타리)이다. 중심과 주변과의 관계가 해체됨으로서, 개인을 개인답게 만드는 내면이라 할 만 한 것은 모두 표층으로 기어오른다. 때에 따라 어떤 것은 기층으로 내려앉는다. 고정된 라이트 박스에는 마치 어항 속의 부유물처럼 떠오름과 가라앉음이라는 잠재적인 운동감이 있다.
인간의 평면성을 가장 극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아마도 그림자일 터인데, 분리된 3개가 한 쌍을 이루는 작품 [Anonymous Face](2011)는 투명한 재료에 이미지를 출력한 후 검은 판에 붙여서 흐릿한 실루엣만 떠돌게 했다. 인간 형상은 뿌연 그림자처럼 보일락 말락 한다. 이 예외적인 작품에서 검은 판은 어떠한 빛도 빠져 나가지 못할 만큼 밀도가 높아 보인다. 빛과 결합된 색 입자들의 순간적인 조합이 익명의 얼굴/몸에 또 다른 표정과 서사를 만든다. 작품 [Anonymous Face](2006, 2010)에서 왼쪽과 오른 쪽의 흑백 초상의 열은 성의 차이가 희미하게 가늠될 뿐이다. 조금씩 엇겨 배치된 이미지들은 반복 속의 차이 속에 정확한 재현을 교란시킨다. 아래에 푸른 LED 조명을 한 두루마리 형태의 초상에서 발견되는 많은 스크래치와 투명 필름 위에 새겨진 흐릿한 초상은 빈티지 사진 같은 분위기이다. 장양희의 작품은 디지털 프린트를 활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고풍스러움이 있다. 많은 작품에서 발견되는 나무틀 또한 아나로그 풍이다.
화석이나 오래된 물건 같은 무수한 층들을 부각시키는 것 또한 빛이라는 역설이 있다. 작품을 이루는 복합적인 층들은 수평으로만 중첩되지 않는다. 걸려 있는 작품의 경우 아래를 흩트려 놓기도 하고, 눕혀 놓은 작품의 경우 표면에 들쑥날쑥함을 부여하기도 한다. 대학원에서 전공한 판화는 작가가 좋아하는 방식인 중첩에 구체적인 방법론을 제시해 주었으며, 설치와 결합되어 공간적인 중첩으로 확장시킨다. 이번 전시에서 설치의 묘를 살린 것으로 투명 필름에 프린트된 군중 이미지를 둥글게 말아서 기둥처럼 세워 놓은 작품이 있다. 관객은 그 안에 들어가서 볼 수 있는데, 이 속이 텅 빈 군중들은 지하철 역사 같은 복잡한 곳에서 사람들을 헤치고 나가야 하는 경험을 일깨운다. 투명 인간화 된 모습에서 군중의 가상성 또한 연상된다. 실체감 없는 텅 빈 기둥으로서의 인간은 설사 얼굴이 나타났다 해도 익명적일 수밖에 없다. 그들은 그 누구와도 교체될 수 있는 대중들이다.
전시장 입구에 설치된 작품은 거리에서 몰래 촬영한 군중 사진을 가로로 잘라 블라인드처럼 쌓아놓았다. 기둥 형식이나 블라인드 형식의 설치는, 여러 장이 아닌 한 장의 투명 필름이 사용될 경우에도 많은 층위를 발견할 수 있다. 군상으로서의 인간은 분자적 이합집산의 산물이다. 몸에 얹힌 하나의 덩어리인 머리는 그 앞면에 백 개가 넘는 근육이 깔려 있는 가장 미묘한 표면을 가지고 있다. 복잡한 층들이 상호 작용하여 만들어지는 얼굴 표정은 개별적 특성과 직업, 성격이 가늠되며 타자로 하여금 느낌과 읽기의 대상이 된다. 장양희의 작품 역시 그 다층적 표면이 상호작용을 통해 어떤 효과를 낸다는 점에서, 얼굴이 가지는 해부학적, 심리적 과정을 반복한다. 가장 표현적인 부분인 눈이 없기에 표면들 간의 상호작용은 인간적 차원이 아니라, 원소적 차원까지 소급된다. 우리는 타인의 얼굴에서 폭죽처럼 터지는 웃음이나, 표현 되지 못한 채 서서히 가라앉는 침전 물 따위를 발견할 수 있다.
알폰소 링기스는 [낯선 육체]에서 얼굴은 원소의 표면이라고 말한다. 이 구멍들의 배열로 이루어진 얼굴, 짙은 암흑이 깃들인 텅 빈 구멍들은 타인의 열망과 갈망으로 채워진다. 알폰소 링기스는 타자들로 존재하는 자유로운 원소들의 응결물을 만지고 포옹하면서 체험하는 관능적인 본성들의 변성이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개인들은 오로지 남성적이거나 여성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성전환자, 다성체, 무성체, 사이보그, 늑대인간, 동성애자이기도 하다. 그들은 유(類)를 가로지르는 자신들의 신체조직과 관능을 동물들, 식물들, 강들, 기계들, 영혼들, 죽음과 결합시키면서 특이한 기호학과 문화를 정교하게 발전시킨다. 알폰소 링기스는 우리와 대면하는 타자가 자신을 드러내 보일 때 그/그녀의 얼굴과 몸은 단지 우리가 해석하기 위한 지시적이고 유익한 기호들이 형태화되는 단순한 표면이 아니라고 말한다. 리비도는 육체의 일부들, 부분들, 쾌락들이 어우러지는 현장이다. 그곳에서 양성체, 성전환자, 샴쌍둥이의 체액들, 육체의 부분들, 표상들이 결합될 때 리비도의 갈망과 쾌락과 오르가슴의 해방이 이루어진다.
장양희의 작품에서 비(非)남성적 비(非)여성적인 육체의 소지자들은 개인들의 기호학 속에서 배열되지 않는다. 그것은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이라는 이분법적 개념에 따라 형성된 지배적인 기호학을 침묵시킨다. 다양한 색감과 형태, 밀도를 가지는 얼룩들은 희미한 해부학적 참조 대상과 어우러져 정신이라고도 물질이라고도 할 수 없는 미묘한 대상을 만듦으로서, 가장 익숙한 대상인 얼굴은 가장 낯설게 된다. 층과 층 사이의 빈 공간을 사이로 입자처럼 이합집산 하는 것들에 제한을 두는 것은 네모난 나무틀뿐이다. 또한 그 나무틀들의 배치는 전시 공간에 의해서만 한정될 뿐이다. 얼굴은 덩어리가 아니라, 계열화 된 원소들의 끝없는 연결과 분리의 과정 중에 있다. 그것은 얼굴과 몸, 마음에서 고정된 것은 없음을 보여준다. 눈이 제거되거나 희미한 익명적 초상은 의식 너머를 향한다. 인간은 생존과 성공적인 사회생활을 하기 위해, 자신은 물론 타인의 얼굴과 몸에 대해 무의식적 차원까지 긴밀하게 반응하곤 한다.
바다 같은 변화무쌍함이 특징인 무의식의 세계에서 코드화된 얼굴은 흐릿해진다. 거기에서는 인종도, 성도, 계급도, 나이도 불확실해진다. 밀도에 따른 원소의 운동 같은 것들이 발견될 뿐이다. 들뢰즈과 가타리의 [천개의 고원]은 얼굴에 내재된 원소적 익명성을 길게 논한다. 저자들에 의하면 얼굴은 흰 벽-검은 구멍이라는 체계를 가진다. 얼굴은 말하고 생각하고 느끼는 자의 외부를 둘러싼 표피가 아니다. 본래 얼굴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다. 얼굴은 그자체로 잉여이다. 거기에는 차원 없는 검은 구멍, 형식 없는 흰 벽이 있다. 구체적인 얼굴은 흰 벽 위에서 모호하게 그려지며, 검은 구멍 안에서 모호하게 나타난다. 구체적인 얼굴들은 얼굴성이라는 추상적인 기계로부터 태어났다. 그래서 얼굴에는 비인간적인 어떤 것마저 있다. 장양희의 작품 속 얼굴에도 인간 안의 비인간적인 것이 나타난다.
그것은 본래부터 생명 없는 백색 표면들, 빛나는 검은 구멍들, 공허와 권태를 지닌 거대한 판이다. 판으로서의 얼굴은 비인간적이며, 괴물적인 복면이다. 중첩되는 차원들이 순간적으로 조합되어 생성되는 얼굴은 조직화를 벗어난다. 이렇게 들뢰즈와 가타리는 인간이 비인간성들로부터만 만들어진다고 본다. 거기에는 얼굴 이전의, 그리고 얼굴 너머의 비인간성이 있다. 그것은 탈영토화의 선들이 절대적으로 긍정적이 되는 비인간성이다. 얼굴의 비인간성이 강조되는 장양희의 초상은 결코 선행하는 기표나 주체를 상정하지 않는다. 그 얼굴은 풍경을 지시한다. 얼굴은 어떤 그림을, 그림의 어떤 단편을 상기시킨다. 들뢰즈와 가타리에 의하면 통상적으로 얼굴은 강력한 조직체였다. 얼굴은 직사각형이나 동그라미 안에서 의미생성과 주체화에 이용할 얼굴성의 특징들을 취한다. 장양희의 작품은 이러한 얼굴의 조직화에서 벗어나려 한다. 기표의 벽을 관통해서 주체의 검은 구멍으로부터 빠져 나오면서 얼굴은 해체된다.
추상적인 기계는 진정한 탈얼굴화의 수행자로서, 자신의 행로에서 지층들을 해체한다. 그것은 탈영토화의 선들과 창조적인 도주선들 위로 흐름들을 인도한다. 얼굴에서 해방된 각각의 특징들은 리좀을 만든다. 그것은 부분 대상들의 모음이 아니라 살아있는 블록, 줄기들의 연결 접속이다. 이렇게 얼굴은 강렬한 탈영토화를 표상한다. 전선들로 어지럽게 연결된 장양희의 초상은 주체성이나 실체성이 아니라, 개체화된 배치물 전체이다. 그것은 개인도 전체도 아닌 진정한 익명성을 보여준다. 두 명 또는 세 명에 속하는 존재가 아니라, 무수한 의식들이 공존을 논하는 메를로 퐁티는, 이러한 사회에서 자아와 타아의 상호 공존성 또는 가치성, 즉 주체 없는 익명적 사고를 발견한다. 그는 [지각의 현상학]에서 타인은 세계에 대한 나의 조망에 갇혀 있지 않다고 본다. 조망은 한계를 가지지 않고 자발적으로 타인의 조망에 스며들며, 우리 모두가 지각의 익명적 주체들로서 참여하는 유일한 세계로 모아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현재의 두께에서 작가는 자유의 토대를 발견한다.
이선영(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