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게와 두께: 정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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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현의 작업에는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희롱하는 놀이정신이 깔려있다. 그의 작업에서는 프레임을 통해 보는 영상에서 늘 경험하기 마련인 '가상과 현실의 대립'이 약화되고, 프레임 저편의 가상세계를 향한 인간의 시선과, 가상세계에 다가가기 위한 자발적 몰입, 그리고 미디어장치를 통한 허구적 세계들의 연결 등이 놀이를 위한 재료가 된다. 그리고 그의 영상작품은 디지털방식으로 제작되었지만, 이 작품을 제대로 맛보기 위해서는 영상미디어의 원시시대라 할 수 있는 19세기에 손으로 만든 장난감-시각장치들, 그리고 그 시대 이미지문화의 현대와의 거리, 차이, 또 작가가 구사하고 있는 의뭉스런 배합의 기교를 이해해야 한다.
이번에 선보이는 <숫자>, <일> 등에서 돌아가는 판은, 같은 형식의 예전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영화세트장의 조형물 혹은 테마공원이나 상점가의 회전간판 같기도 하고, 19세기 유럽에서 유행했던 '쏘마트로프'(Thaumatrope)를 연상하게 하기도 한다. 그리고 마치 오래전에 폐장해버린 놀이공원에서 맡을 수 있는 '상투적인 환타지를 위한 가짜 리얼리티'의 공허한 냄새를 풍기고 있다.
쏘마트로프는 원형 딱지의 양면에 두 개의 그림을 그려놓고, 빠른 속도로 회전시켜서 이미지가 하나로 겹쳐 보이도록 한 장난감인데, 파리의 영화박물관에 가면 당시에 그것이 대중들 사이에서 얼마나 유행했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산더미처럼 쌓아 놓았다. 값싸고 간편하게 주머니에 넣어 다닐 수 있는 물건이었기에, 아마도 어느 집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물건이었을 것이다. 동영상이 없던 시대에, 두 개의 이미지가 연결되어 만들어내는 허구-환영의 매력은 하나의 마술과도 같이 사람들을 매료시켰고, 이처럼 실제로는 없는 것이 현실인 것처럼 나타나는, 즉 가현운동의 원리가 키네티스코프(kinetiscope), 조트로프(zotrope) 등으로 발전해 나중에 영화=시네마토그래프의 탄생으로 이어짐은 주지의 사실이다.
정상현은 캘린더 혹은 컴퓨터의 배경화면처럼 아름다운 풍경을 배경으로 하면서, 그 앞에 연이어 다른 이미지들을 쏟아내는 회전판을 배치했다. 쏘마트로프에서는 단지 두 개의 이미지가 교차하지만, 여기서는 회전할 때마다 달라지는, 수십 개의 이미지들이 불려나오고 그것들이 배경과 결합되어 하나의 장면을 만들고는 재빨리 사라지는 모습은, 차곡차곡 장면이 이어지는 천일야화 같은 스토리텔링의 순환을 연상시킨다. 그것은 영화장면의 연결을 숏(shot)들의 변증법적 충돌에 의한 의미생산의 연쇄로 보았던 S. 에이젠슈테인의 몽타주처럼 역동적인 것이 아니라, 그 보다 초창기에 제창되었던 프도흐킨의 '벽돌론'처럼, 마치 공장에서 상품이 생산되듯이, TV가 새로운 장면을 간단히 합성해내듯이, 이미지의 조합에 의해 상황을 생산해 내는 기계를 닮았다.
이처럼 끝없이 교체/반복되는 장면의 매트릭스는 현대사회에 이미 이미지 생산과 배합의 기술이 산업으로 정착되었음을 상징하고 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이 세상 어디서건, 문명의 힘이 미치는 곳에선 이러한 생소한 만남은 쉽게 이루어진다. 교통기관의 발달로 편리해진 인간의 이동에 의해, 세계각지에서는 일상적으로, 마치 옷에 단추를 채우는 행동만큼이나 쉽게 일어나는 이질적 문화/문명의 만남과 충돌이 일어나고, 그때마다 장소는 새로운 문맥으로 변질된다. 하지만 신화시대와 달리, 현대에 그것은 일상적으로 생산되고 소비되는 덧없는 순간에 불과하다.
정상현의 작업은 현대의 도시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리얼리티의 재편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디즈니랜드가 아니라도, 현대의 도시는 수없이 많은 기호의 생태계이자, 강력한 시각미디어의 스펙터클로 가득한 밀림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새로운 만남과 의미와 문맥의 충돌, 새로운 문맥의 출현과 소멸은 일상적인 일이다. 작가가 그리고 있는 것은 동화처럼 환타지를 상품으로 생산하는 현대의 도시문화를 상징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장치에는 그 어떤 것들이 불려오더라도 테마파크와 같은 가짜리얼리티의 냄새를 풍긴다. 이번에 발표된 <일>(one)에서는 현대인들이 유년시절부터 소비해 왔을 법한 이미지들이 차례차례 등장하는데, 그것들은 주로 어린이들의 그림책에 자주 사용되는 것들로서, 마치 상점가의 입구를 장식한 광고조형물의 캐릭터를 닮은 것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이미지들은 허수아비처럼 공허하면서도 어리고 천진난만한 상상력이 한 때 열정적으로 소비해왔던 이미지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이미지들은 스스로 가짜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강조하듯이 드러내 보이고 있다. 그 이미지들은 CG로 만들어진 매끈한 영상이 아니라, 아날로그영상이든 입체물의 촬영상이든 어설프게 마감된 단면의 실상을 송두리째 보여주는 기계식 장치의 추억을 불러일으킨다. 어딘지 모르게 폐허의 쓸쓸함이 느껴지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흔히 디지털 영상작업의 그래픽처럼 투명하고 차가운 느낌도 없고, 마술사의 손처럼 다른 이미지로 바꿔치기를 계속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허수아비 같은 가짜 리얼리티의 공허함이 배어나오는 것이다. 게다가 장치들은 손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아니면 너무 오래돼서 조금은 삐거덕 껄떡대며 돌아가는 오래된 오르골 같다.
정상현의 다른 작품들, 예를 들어 <새벽의 침입자>, <갤러리 여행을 제안합니다>, <순간이동 여행> 등을 보면 오늘날의 게임처럼 현실 저편의 가상공간을 인터페이스장치로 제어하며 보는 영상이 아니라, 스스로 장치를 조작하며 몰입해가는 놀이정신이 강조되어 있다. 그것은 19세기 사람들로 하여금 조그마한 환영의 꿈에 젖어 간단한 장난감에 열중하도록 만들었던 것이 바로 이 놀이정신과 몰입이다. 산업혁명 후에 상공업이 발달했던 19세기에는 유럽뿐 아니라 중국이나 한국, 일본에서도 다양한 시각장치들이 유행했었다. 이를테면 'toy theater', 'stereo scope', 'tunnel view', 'kaleidoscope', 'peep show book', 'Raree show' 등등. 우리나라에서도 구한말에 이러한 장치들은 '요지경(瑤池鏡)상자' 혹은 '만화경'등으로 번역되어, 그 용법은 다소 혼란의 양상마저 띄고 있으나, 대체로 '마술과 같은 요상한 환영을 제공하는 장치'라는 점에서 큰 차이가 없다.
오늘날에는 지구적 규모의 정보시스템이 개개인에게 다양한 가상성과 환영을 제공하고 있지만, 정보미디어의 역사에서 보자면 원시시대라고 할 당시에 보통 사람들이 소유하고 싶었던 욕망이 이 조그마한 장치를 향한 열정의 원인이었다. 요지경이나 만화경은 그 구멍을 향해 자발적으로 들여다보는 행동을 통해서만 몰입은 가능하다. 그러나 현대세계는 미디어는 대중소비시대의 정치적 도구가 되었다. 유럽에서 보더라도 이러한 소박한 시각장치들이 '파노라마' (그 반대의 형식으로서 '파놉티콘') 영화, TV 등으로 확대되면서 어느 듯 사회적 기제가 되고, 관심은 억압과 해방의 정치학으로 번져버렸다.
정상현의 작품들은 고도화된 정보화 시스템에서 오히려 일종의 동화 같은 세계를 넓혀가고자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여기에는 사실과 허구의 경계를 희롱하는 놀이정신이 근본에 깔려있다. 이 상자들이 신체를 개입한 1인칭적 경험이라면 밀실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관객이나 작가는 이 밀실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요지경'은 제한된 시야로 시선을 몰입시키는 방식이 아니라, 상자의 안과 밖의 두 개의 병행하는 리얼리티가 결국 하나의 사건으로 만나는 것으로 끝난다. 트럭이 상자를 뭉개버리고, 용접기가 천정을 뚫어버리고, 망치의 진동이 상자 안의 세계를 흔드는 등이다. 즉, 이 작품들에서도 관객의 의식은 이 밀실을 응시하지만, 결국에는 그 세계와 그 바깥의 실재하는 세계를 연결하여 스토리를 생산하는, 또 하나의 쏘마트로프로 (밀실이)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미지다>에서 보듯이 그림이 그려진 현수막을 들고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말하며 숨바꼭질 놀이를 하고 있는 주인공은 단순히 순진한 티를 내는 것이 아니라, 이 놀이에 참가하는 사람의 의식을, 나아가서는 현대의 미디어환경에서 현실과 가상의 경계에 서있는 인간의 의식을 깨우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이미지조작이 인간에게 적대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몰입하고 삶을 고양하기 위해 발명한 놀이라고 주장하는 듯하다.
이번 전시에서 특히 눈을 끄는 광경은 전시장에 배치된 2개의 <바위>이다. 하나는 이 전시장을 가득 채울 만큼 높이 3미터 50센치의 '대형 쏘마트로프', 또 하나는 디지털 이미지를 프린트한 종이가 겹쳐져 두께가 60센티미터나 되는 '오브제'이다. 전자는 관객들에게 낯익은 장치이지만 조그마한 장난감이 커져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광경을 목격하는 마법과 같은 체험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 대신 디지털영상 속에서처럼 한 바퀴 돌 때마다 새로운 이미지를 꺼내놓는 마술은 부리지 못한다. 전시장 전체가 하나의 작품을 위한 배경으로 사용됨으로써 이 '놀이장치'의 환영이 동화 속처럼 확대되고, 시야를 꽉 채우며 들어찬 이 장난감 앞에서 관객은 잠시 작은 병정이 되어버린다. 물질성을 벗어난 디지털이미지이면서도 고의로 꿀렁꿀렁하게 만든 표면, 관객의 의식은 동화와 현실, 가상과 실재의 사이에서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이에 비해 후자는 바위가 인쇄된 종이를 수천 장 재단해서 그것을 하나의 겹쳐서 덩어리로 굳혔다. 마치 '디지털 이미지의 비물질성'이라는 상식에 대해 딴지를 거는 듯, 보통이라면 컴퓨터의 오작동으로 발생할 법한 에러를 오브제의 세계로 옮겨 놓았고, 이 역시 반대편에 위치한 큰 <바위>처럼 회전한다. 이 기묘한 대비는 지지체로부터 완전히 독립하여 비물질로 표류하는 디지털 이미지를 현실공간에 이끌어냄으로써, 반대로 실재공간에서 허구세계와의 경계영역으로 밀어내고자 하는 시도라고 보인다.
이처럼 정상현은 실재하는 오브제와 이미지의 허구성을 교차시키며 그 사이의 세계를 개척하고 있다. 그것은 만화경과 같은 풍경을 생산해내는 시각장치로 나타나기도 하고, 혹은 이 전시에서처럼 공간의 전복을 꾀하는 방법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의 작품에서 가상과 실재는 서로 대립하여 존재하면서 일정한 시야와 원근법을 적용할 때에만 조망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욕망과 자발적 몰입을 통해 소비하는 1인칭적인 환영의 소재인 것이다. 그것이 가짜리얼리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하고 흥얼거리며 실재와 가장된 세계 사이에서 '노는' 놀이정신이 없다면, 그가 마련한 장치는 염세주의자의 무대가 될 수밖에 없다.
이원곤(단국대교수/미디어예술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