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struction: 김영애

8 - 28 September 2010
Installation Views
Press release
김영애의 이번 전시회 Construction에서 작가는 시간과 변화의 흔적을 담은 나무 조각들을 모자이크로 조합해 놓았다. 이 작품들은 감각적인 인상을 주는 동시에 보는 사람들에게 원래의 인식적 요소들에 자유롭게 반응하고 해석할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소재로 선택한 목재는 스케일과 색채에 작가가 개입함으로써 추상화 되고 원래의 쓰임새로부터 많이 달라져있다. 무슨 목적을 위한 것일까? 한 가지의 가능한 답은 우리로 하여금 삶과 그것을 이루고 있는 것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가장 근본적인 요인인 ‘변화’의 본질에 대해 그의 작품을 통해 한번쯤 생각해 보게 하려는 것이 아닐까.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은 그 형상이든, 성질이든 시간이 감에 따라 특징이 강해지거나 약해질 수도 있고, 새롭게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작가는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작가의 두 번의 개인전, Domus (2002)와 Vestigia (2005), 때와 같이 Construction 에서도 작가의 ‘시간’과 우리들 주변에 있는 ‘구조와 표면’에 대한 탐구는 계속된다. 스케일과 색채가 눈에 띄게 다양해지고 판화의 판을 만들 때나 펄프를 주조하기 라텍스 틀을 제작할 때 쓰이던 목재를 직접 작품에 쓰기 시작했지만 작가 자신만의 시각 언어는 여전히 미묘하고 예리한 모듈로 되어있어 이 신작들이 일관성 있고 논리 정연하게 전작들과 소통하고, 진행되는 연속 작품임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이 작품들은 우리가 어떻게 살고, 또 어떻게 우리 주변의 세상을 이해하고, 해석할 것인가에 대한 또 하나의 고찰이다.
 
“나는 작업의 소재들을 철거현장에서 구한다, 판화의 소재로 쓰던 반짇고리 속의 조각천처럼, 버려진 건축자재들은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단지 어디에 쓰였고 얼마나 오래되었냐 만이 아니라, 만든 자의 의도와 미감, 영감…그런 것에 따라 또 세월에 따라 변형된 모습 등..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지 모를 것들을 벗겨진 칠이나 쪼게 진 결이 아름다워 잠깐 멈춰서서 나무 조각들을 들여다 보지만 분명한 건, 아무것도 단지 표면인 것은 없다는 것이다. 그 아래로 드러나진 않지만 겹겹이, -----시간과 역사의 흔적이 있다.(김영애, 2002년)” 
 
지난 10년 동안 작가는 작품을 통해 시간과 역사, 전통 – 특히 건축에 관한 – 에 대한 탐구를 해 왔다. 양철 지붕을 그대로 펄프로 주조한 Byok Corrugated (2001) 시리즈와 목재를 얇게 떠서 만든 판으로 인타그리오(Intaglio)로 찍어낸 판화작품 collegraph, Jib(2002)시리즈가 그 좋은 예이다. 이번 개인전에 발표된 작품들도 이전의 Byok Corrugated 나 Jib 시리즈의 흔적 -특히 모듈화된(조각보자기 같은) 면에서 - 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또한 변화도 있다. 수평, 혹은 수직으로 길게 뻗어 나가는 선이 사라지고 동시에 거의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모듈을 강조함으로써 더 감각적이고 인지적인 작품이 제작되었다. 이것은 스케일과 포맷의 변화에서 얻어진 것이다. 
각각의 나무 조각의 붓 자국이나 물감의 흐름을 풍경이나 인물로 읽을 수도 있고, 아님 단순히 크고 작은 네모 조각으로 볼 수도 있는 이 작품들은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 보기를 요구한다.  색채에 있어서 화려한 클레(Klee)나, 혹은 침울한 터너(Turner)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이것들은 분명 조용히 바라보며 명상하게 만드는 추상 작품이다.
이 작품들이 우리를 사로잡는 힘은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힘에 달려있다. 하나 하나의 조합은 이 목적을 위해 자연발생적으로, 혹은 은근하기도 놀랍기도 한 손길에 의해 변형된 소재를 조화롭게 짜맞춤으로 되어있다. 목재의 쪼개진 선이나, 나무결과 톱 자국 등은 시각적으로 선과 운동감을 강조하고 이런 요소들은 작품에 리듬감을 준다.
이 음악성은 다양한 스케일과 폭 넓게 선택된 색의 안료를 섞은 제소(gesso)를 입힌 나무조각을 반복되는 모자이크로 세심히 짜맞추어 얻어낸 결과이다. 형태와, 구조, 색채의 물결이 리듬과 변화의 울림을 전달한다. 이 모자이크 맞춤에 있는 그 어느 조각의 흐름도 고정되거나 변하지 않거나 끝난 것이 없어서 보는 사람 각자가 작가의 개념적, 미적 언어에 반응하면서 자신만의 비젼으로 다시 조합하여야 한다, 이런 자유로움은 우리의 예술 형식 중 가장 추상적인 예술인 음악이 갖는 장점이다, 
작품 속의 이런 음악성은 특히 ‘YellowConstruction’이나 ‘PinkConstruction’같은 작품들에서 더 강하게 느낄 수 있다. 마치 뜨고 지는 태양의 열기와 온기의 크레센도와 디미누엔도가 들려오는 것 같지 않은가. 그리고 팬 파이프를 연상시키는 이미지로부터 이 시각적 음악이 맑고 깊게 울려 퍼지지 않는가. 
 
그렇다면 레터링이 스텐실된 낡은 나무 상자에서부터 조합된 회색의 작품들은 어떤 시간과 장소로 우리를 이끌고 있는 것일까. 그 조각난 글자들이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혹은 인쇄된 문자와 의미에 아무런 관련성이 없는 걸까? 아니면 이 작품들은 우리를 규정하고 우리와 떼어 놓을 수 없으면서도 때로는 간과되고 끊임없이 진화하는 언어의 구조와 힘에 대해 뭔가를 말하는 걸까. 그리고 ‘GrayConstruction’을 통해 작가는 분명 삶이 흑과 백의 스팩트럼 안에서 울린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다른 작품에 비해 큰 조각들 속에 수묵화처럼 먹으로 흘러내리는 듯, 리듬감 넘치는 그 이미지들은 팔만대장경처럼 다면성을 갖고 있는 것도 같고 그것이 소장되어 있는 사찰의 오래된 기왓장을 연상하게 한다.
팔만대장경처럼 이 작품들도 자연의 영속성과 인생의 무상함에 우리의 관심을 조심스레 주목시키는 것 같다. 그렇다면 톱 자국 같은 것은 조금이라도 인간의 노력과 그들이 지닌 기술의 흔적을 보여주는 역할을, 메카니즘과 만들 이와 재료 사이의 조화와 서로 수용하고 타협함을 보여주는 것은 아닌지. 이렇듯 Construction의 작품들을 좀더 자세히 감상할 필요가 있다. 
명백한 구상적 모티브로부터 자유롭고, 형식도 의미도 배제된 이 나무 모자이크 작품들은 그렇다고 공허한 추상은 아니다, 작가의 손질에도 불구하고, 그들만의 나이테, 쪼개짐, 마모, 못 자국 등에서 볼 수 있는 목재 원래의 쓰임새와 지난 시간의 흔적이 남아 있어 보는 이들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할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이번 전시회의 작품으로 작가는 버려진 목재를 재활용하여 섬세하면서도 당당하게 짜맞춤으로 우리에게 눈으로 보고 느끼고 동시에 생각할 것을 요구한다.  만약 작품들을 어떤 대상과 관련짓기를 바란다면 그건 보는 사람 자신일 것이며 자신들의 경험이 그 대상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작품 속엔 말레비치가 말하는 평면 위에 포착된 사물의 환영인 재현의 요구가 완전히 제거되어 있기 때문이다 
작가의 노력의 결과로 끊임없는 ‘변화’뿐만 아니라 이것과 관련된 무상함도 담고 있는 릴리프 작품이 선보이게 되었다. 김영애는 썩어 없어질 잔해로부터 아름답고 명상적인 작품을 조합하고 또 동시에 영속성 -사라짐과 남음 -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