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me Thoughts for Happy Trurn : 이공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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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은 건축으로밖에 설명되지 않는다.
건축가는 건축을 통해 존재의 가치에 이르려고 한다.
어떤 사람이든 자신이 하는 일에 본질이 무엇인지에 평생을 걸지만,늘 거기까지인 것이 대개의 인생인 듯하다.
결국 건축도 가고 사유만 남을 일이지만 그래도 건축은 결국 실천인 탓에 살아야 한다.
온갖 장식적인 것을 제거하면 가장 본질적인 것과 대면할 수 있다고 믿었던 모더니즘교육을 뒤로하고 의심과 오해를 해결하지 못한 채 현업으로 세상과 마주했다. 그때 그곳의 경치는 또 다른 이데아, 포스트모던 혹은 디컨스트락션에 이미 가 있었음을 어렴풋이 알았다. 하지만 현업은 성장과 효율이 가치인 그 시절에서 '새로운 창조는 절대적無 , 이른바 모든 형태의 영도 Zero degree, 사각형은 어떤 재현과도 관련 없는 것' 으로 믿고 그렇게 일해야만 했던 90년대였다.오랜 강사 경험과 탐구에도 불구하고 학교는 막연히 두려웠다. 한번도 상상하지 못한 곳에 내가 있게 되었다는 사실로 어색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준비되지 못해 어설픈 군사가 예상치 못한 전쟁에 참전하듯 그저 부족한 것을 부끄러워하지도 못한 세 번째 전환에서 바쁜 학습을 해야 근근이 내일의 수업을 맞을 수 있었음을 고백한다. 건축학습은 현장의 확인과 체험을 통해서만 지식이 될 수 있는 경험에 학문이었고, 그 후에나 교육할 수 있는 것이어서 언제나 아슬했다. 다시 간 학교에서 몇 해간은 실천은 잊고 전력을 다해도 지적인 결핍과 궁핍은 벗어나기 힘들었다. 세상일이 항상 그러하듯 실천의 기회는 내 짐작과 결심보다 일찍 교내 건축으로 시작되었고 모든 기회가 감사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건축함은 근육과 같아서 잠깐이면 소실되는 것이었고 절실함에서 뒤진 건축은 건축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기에 충분히 경험하기도 했다. 때론 체급에도 맞지도 않았고 경쟁력 없음은 당연한 결과였다. 일우처럼 다가온 몇 개의 실천된 건축들을 겪으면서 다시는 건축하지 못할 것 같거나 절필할 결심을 몇 번이고 번복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이제 건축을 온전히 할 수있는 출발점에 다시 설 수 있음에 감사하고 즐겁다. 좀 더 솔직하면 건축덕후로 덕질 하는 것 이외에 별다른 선택지도 기회도 빈곤하기 때문인 것이 이유의 대부분이다. 건축을 좀 더진지하게 몰입해야 한다는 욕망과 건축을 만날 때마다 내 어설픈 오만함에서 비롯된 질투가 이제 살아갈 에너지가 될지 모르지만, 이제 내 건축이 본질을 사유하고, 격조가 묻어나길 소원한다. 이를 위해 내 건축이 근대에서 될 수 없다고 믿었던 평균값 범위 밖의 극한에 도전이거나, 공존 불가로 믿었던 '모던 바로크'이거나 '다원 Darwin과 니체 Nietzsche'의 합의 개념을 병치, 혼합, 중첩, 반복, 해체 등의 과정을 통해 생성해내거나 자유로운 새로운 관계를 구축하는 실천의 기회를 준비한다.
이 준비의 시작을 여기 전시로 대신한다. 민망하고 겸연쩍은 일이기도 했지만, 그간 내 곁에 있어준 흔적들을 마땅히 처분하기도 녹록지 않아 날것으로 내놓고 이별하기로 했다. 물론, 내 건축에 관한 관심은 의심으로부터 자유로운 적이 없지만, 그래도 건축하고자 하는 의지는 자신의 열정에 따라 살지 않는 삶은 무의미하다는 단순한 진리로 읽혀 지길 바란다. 건축의 탁월함은 시대에 대한 겸손한 태도의 결과이며, 그러한 태도는 건축물이 이 시대를 초월하여 살아남을 수 있게 해준다는 현답에 이르는 길을 오른다.
'이러다가 언젠가는 아주시동이 안 걸릴 때가 올 것이다.
그래도 그때까지는
열심히 살아야지
오래 묵은 자동차로 끌고 가듯
세상 속으로들어간다!
*나태주의 세상 속으로 -
주요 건축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