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석: 신하정
대상과 형상의 경계에서
구나연(미술비평가)
1.
재현의 과정에서 대상을 선택하고 다루는 방식은 회화의 전통적 행위이다. 무엇인가를 화면 안의 환영으로 변이시키는 경로 안에서 대상과 화가 사이의 개연이 형성된다. 특히 그 대상이 '돌'과 같은 완전한 즉자 상태일 때, 사물에 다가가는 것은 전적으로 화가의 의식이다. 이것이 자기 충족의 상태에서 침묵하는 사물을 캔버스 위의 고유한 대상으로 깨운다. 신하정의 회화가 어떤 자각의 순간으로 이끄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의 회화는 화가의 의식과 대상 그리고 그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투명하고 분명한 긴장의 장소이다. 여기에는 화면을 중심에 두고 형성되는 면밀한 관계항이 있는데, 돌이라는 대상을 둘러싼 개별과 전체, 문화와 자연의 관계, 또 이를 '회화화'하는 과정과 의미의 항들이다.
2.
먼저 대상을 두고 벌이는 의미의 그물을 단단하게 수렴하고 있는 것은 신하정이 선택한 수석(壽石)의 이미지를 통해서이다. 그렇다면 그가 이 대상을 선택하고 변용시키는 이유와 단계를 살펴야 한다. 돌은 자연의 환유이며, 또한 신적인 것의 환유이다. 거석 문화가 말해 주듯, 돌은 불변과 사후의 신앙에 대한 문명의 매개가 되어왔다. 특히 동양에서 발달된 '수석'은 자연의 초월성과 항구성을 함축하고, 그것에 미적 취미를 부여한 행위이다. 시간을 거스르듯이 서서히 마모되며 모양을 형성하는 돌에 선망을 갖는 것이다. 근원을 알 수 없는 자기 충족적 대상이 인간의 선택과 의미의 부여에 의해 개별화된 문화의 상태로 변주된다.
다른 존재와 아무 관계도 갖지 않던 즉자성이 미학적 리듬으로 이동되면서 수석의 형과 색에 대한 반영이 탄생하고, 이름이 붙여진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를 부여하는 주체는 다름 아닌 '나'이다. '나'는 무엇을 근거로, 객체를 미적 대상으로 바꾸는가? 주체와 대상 사이에서 나타나는 가변적인 경계의 설정들은 '내'가 세계를 의식하고 이를 자기 안으로 끌어들이는 단계이면서, 회화가 사물을 화면 위의 견고한 의미로 체현하는 수단이다. '돌'은 그가 세계를 의식하는 우연한 절차에 대해 묻는 개체임과 동시에 회화가 대상과 교류하는 과정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질료이다.
따라서 신하정이 그린 다양한 수석들은 돌이라는 개체의 물성과 그것이 단일한 일루전으로 이행하는 경계선 위에 서 있다. 그것은 돌이면서 <뒷모습>이고, 돌이면서 <덩어리>이며, 돌이면서 <코끼리>인 것이다. 이는 비단 자연에서 비롯된 돌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무엇이 돌이며, 어디까지를 돌이라고 할 것인가에 대한 유연한 범주가 지금 우리의 삶과 밀착된 현대의 돌들을 형성하기도 한다. 콘크리트나 사기(沙器) 역시 돌의 영역으로 수용되고 또 변모되면서, 우리가 사물과 관계를 맺어가는 방식을 문제 삼는다.
이렇게 돌이라는 대상으로 경계를 모호히 하는 태도는 그가 속필과 모노크롬이 선들로 이미지를 형성하는 것과도 연결된다. 빠르게 움직이는 붓질은 돌의 육중한 물성을 중화시키고 돌에 부여된 본연의 형태를 부각시켜 점차 관례적인 돌의 속성을 걸러내고 특별한 대상으로 상승시킨다. 그리고 이를 지지하고 있는 것은 이 돌의 형상을 받치고 있는 받침대이다. 흔히 조각의 좌대와 같이 수석을 지지하고 장식하기 위해 사용하는 받침대는 신하정의 작업에서 돌의 무게를 지탱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화면에 자유로이 부유하게 만든다. 돌과 이를 받아 올리는 받침을 통해 그것은 주체의 선택에 의한 분방한 이미지로 전이된다.
3.
<단서(2016)> 시리즈는 석상이 마모되어 돌과 형상의 중간 상태에 있는 대상들에 접근한다. 그것은 어느 형상의 재료가 되었던 돌이 시간에 따라 다시 그 본질로 환원하는 과정 어딘가에 있다. 이는 그가 <축축한 바위(2016)>에서 자연의 풍경을 바라보며 삶과 죽음의 경계가 사라진 지점을 관찰했던 것과도 관련된다. 돌에서 형상을 빚어내고, 이것이 다시 풍화를 거쳐 돌로 회귀하는 느린 순환은 초월적으로 존재하는 자연과 우리의 존재 사이를 오가며, 우리의 감각이 외부 세계를 부분적으로 받아들이며 나름의 특유한 의미로 만들어 가는 것의 유비가 된다.
시간에 대한 돌의 항구성과 초월성이 기원의 토템으로 여겨져 온 것처럼, 자연의 대상을 이미지로 빚어내거나, 형상이라 지시하는 행위는 결국 세계의 영속성 안에 작은 구조물을 세우는 일이다. 무수한 돌들 가운데 한 개를 '이것'이라 지칭할 자유는 흉내 낼 수 없는 자연의 순리 가운데 주어진 우리의 선택이며 권리이다. 하여 신하정의 작업은 돌이라는 대상이 우리의 작은 생활부터 우주까지 아우르는 수많은 경우의 수들을 유동하는 범주의 운동 안에 놓아둔다.
예컨대 그의 근작 <우연한 예언(2018)>은 일종의 거대한 바위이며, 그 속에 또다른 돌들을 잉태한 경험의 통행로를 연상시킨다. 그것은 상상의 돌이지만, 그 형상 가운데 일어나는 구체적 삶의 흔적들이 비밀스럽게 투영되어 있다. 즉 규정할 수 없는 이 형상 안에는 화가의 거대한 의식 안으로 들어온 우연과 필연, 기쁨과 신비에 대한 기록이, 또 이성과 반성의 이전에 우리의 의식으로 섬광처럼 찾아오는 순수한 계기들이 새겨져 있다.
나는 오래전 반구대 암각화와 마주한 적이 있다. 눈 앞에 서 있는 평평한 바위 위에 시원적 염원의 요철을 만질 수 있었다. 수 만년 전의 기도는 여전히 거석의 오목한 틈으로 남아 현재에 울린다. 그것은 알 수 없는 신비한 시간의 개념을 지닌 것으로, 자연의 안에 침묵하며 숨어 있다가 불현듯 우리의 경험 세계 안으로 틈입한다. 신하정이 때때로 마술적인 경험의 축도로 돌을 바라보는 것 또한 그 표면에 형상을 새기거나 돌의 형상과 감촉 그 자체가 우리의 삶으로 치환되는 부분일 것이다. 이는 유한한 공간와 무한한 시간으로 된 세계와의 관계 맺음이며, 이것이 그의 회화가 의미를 발화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사르트르의 유명한 말은 우리의 의식이 지향하는 경험의 세계가 영원한 진리와 본질에 선행한다는 것이다. 적어도 오늘의 회화가 그 전통적 행위에서 끊임없이 새롭게 모색하고 채굴하는 제안이 있다면, 본질을 탐구하는 것을 넘어 특수한 개인의 현존, 그리고 그것이 움켜쥐는 지금과 사물에 대한 의식을 이미지로 꿰뚫어낸다는 점이다. 신하정의 이미지가 제안하는 것 역시 우리의 의식 저 앞에서, 본질 주변을 맴도는 추상의 순수성이 아닌, 특정한 대상을 파악하고 그 습속을 나의 의식 안에서 뒤바꾸고, 대치하고, 투사하며 개별적 세계를 축도해가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는 자연의 풍경을 관찰한 뒤 돌멩이에 이르렀다. 돌은 어디에나 있으나, 그것을 온전히 내 것으로 하는 일은 결코 간단치 않다. 더욱이 그것을 회화로 끌어들였을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재현의 대상은 어디에나 있으나 이를 나만의 미적 의미로 승화하는 것은 다양한 실험들을 통해서 가능하다. 신하정의 작업에서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은 그가 선택한 여러 대상을 그리는 일이 그가 의도했건 아니건 상관없이, 회화의 어떤 속성을 함의하는 지점이다. 하나의 사물이 형상을 향해 나아간다. 그것을 사물 이상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이고, 고유한 형상으로 이끄는 것은 무엇이며, 그 의미는 어떻게 발견되는가? 이것이 신하정의 회화 앞에서 마주할 수 있는 것은 질문의 시작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