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형의 초상’을 바라보는 가설 둘.
반이정 미술평론가
“지각이나 인지의 문제는 메타 회화의 단골 주제지만, 이 전시도 그 문제를 다루는 것 같다. 메타 회화의 주제가 어느덧 시각 예술가 일반에게 필수 과목이 된 모양이다.”
김수지의 2년 전 개인전 <연속하는 도형의 성질>(2016.0305~0325 플레이스 막사)을 보고 대략 저런 내용의 메모를 남긴 적이 있는데 이번에 메모를 다시 꺼내봤다. 어려운 표현 같지만 풀어 말하면 단조로운 오브제들을 나열하는 김수지의 설치 작업이 ‘바라보기’라는 문제를 다루는 것 같다는 의미다. 간유리와 투명유리 사이사이에 놓인 동일한 크기의 하얀 공 두 개가 유리를 통과하거나 유리에 다중 반사되면서 실제 모습과는 다르게 변형되는 점에 착안해서 저런 메모를 남긴 걸로 기억한다. 이는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변화하는 대상의 본질’에 관한 문제를 다룬다.
김수지의 작업은 이후로도 동일한 대상이 주어진 조건에 따라 변화하는 가능성에 초점을 맞춰 전개되었다. 그리고 이 주제를 위해 모노톤의 기본 도형을 재료로 반복해서 사용했다. 투명 유리, 거울, 석고는 현대적인 산업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 재료이고, 이후 여러 작업에서 이 재료로 만든 원형 원추 원통은 조형을 구성하는 기본 단위들이다.
산업 사회의 기본 재료로 단순한 조형물을 만들거나, 쉽게 흩어지는 부드러운 밀가루와 딱딱하고 완결된 형태를 띤 거울을 결합해서, 마름모꼴 반사면을 지닌 원형 거울의 모양을 흉내 낸 <사물을 보는 연습>(2017)은 일상 사물에서 예술의 면모를 발견한 뒤샹의 방법론과 잇닿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세운 첫 번째 가설은 조형의 기본 원리를 다루되, 일상 사물이 예술의 경지와 만나거나 또는 일상과 예술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순간들을 그녀의 작업이 다룬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 가설은 하나의 숙제도 안고 있다. 동일한 크기의 투명한 원형 유리를 비스듬히 겹쳐놓은 <무리수적 소네트>(2017)는 동일한 재료가 ‘주어진 조건’에 따라 다른 외형으로 변형되는 지점을 보여줌으로써, 재현 기능의 변형을 다루고 있으니 말이다. 가령 조형의 기본 원리를 제목으로 웅변한 연작 <도형의 초상>(2016~2017)은 원추, 원통, 원구 같은 기본 도형들을 사용하되, 작품의 관건은 거울과 마주보게 설치된 이 기본 도형들은 앞면 모양과 거울에 비친 뒷면 모양이 서로 다름을 보여주는 데 있다. 김수지가 작업에서 자주 출현시키는 유리나 거울은 시각 예술의 고전적인 기능인 재현의 유비 쯤 될 게다. 앞면과 거울에 비친 뒷면의 모양을 다르게 제시하여, 그녀의 작업에서 거울은 재현의 고전적 기능을 저버리는데 쓰였다.
다시 확인할 점은, 김수지가 작업을 위해 순백이나 투명의 모노톤의 원추 원형 원통같은 기본 도형을 재료로 쓰는 점이다. 동일한 대상이 재현 과정에서 전혀 상이하고 다양한 의미로 분화됨을 강조할 목적에서, 이처럼 무엇과도 섞이지 않은 순결한 재료를 택한 것 같다.
“김수지 설치작품의 단조로운 구성은 다양한 해석을 유도하거나 ‘어떤 방식으로’ 보도록 유도하는 효과를 지닌다.”
김수지 x 송윤섭 2인전, <recto/verso>(2017.0811~0826 플레이스 막)를 보고 남긴 메모는 이랬다. 같은 대상이어도 주어진 조건에 따라 전혀 다른 대상으로 변한다는 것, 대상/현상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는 재현의 공식에 이 같은 이면이 존재함을 강조한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재현에 왜곡이 존재할 수 있다.’는 주장이 왜 중요한지 마음에 드는 해석을 나는 찾지 못했다. 평범한 사물에서 전혀 다른 성격의 무엇을 찾아내는 뒤샹의 ‘발견된 오브제’의 연장선이라고 보면 가장 무난한 답일 테지만 그 걸론 내키지 않았다.
“내 연구는 기억을 있는 그대로의 진실로 해석하는 비디오레코더 모델에서 사실과 허구가 창조적으로 뒤섞인 것으로 이해하는 재구성 모델로, 기억의 패러다임을 바꾸는데 일조해왔다.” - 엘리자베스 로프터스 · 캐서린 케첨 『우리 기억은 진짜일까?』
2012년 작업을 살펴보던 차에 첫 번째 가설이 남겨둔 빈틈을 메꿀 두 번째 가설이 떠올랐다. 프랑스 제목을 한역하면 ‘섬광을 가로지르는 추억’ 정도 될 <어렴풋한 기억 La réminiscence à travers la luminescence>(2012)은 백열전구를 파라핀으로 감싼 20개의 전구 다발을 바닥에 닿을 듯 말 듯 공중에 매단 설치물인데, 전구의 발열로 전구를 감싼 파라핀이 녹아 흘러 내려 각기 다른 모양새로 굳는 과정을 보여준다. 파라핀을 기억의 대체물로 썼다는 작가의 짧은 답변을 듣는 순간 두 번째 가설이 떠올랐다. 2012년 작업과 어쩌면 그 이후로 진행된 작업이 어쩌면 줄곧 인간관계의 기본 문제를 다룬 것일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세웠다. 첫 번째 가설이 조형의 기본 원리를 다루되 일상이 예술로 대등하게 연결되는 지점을 거치면서, 기본에 충실한 재현마저 변형될 수 있음을 제기한 거라면, 두 번째 가설은 변형 가능성이 왜 생기는지에 대한 대답이 될 것이다.
어쩌면 작가 본인이 인간관계에서 받은 상처의 경험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인간관계의 상처는 오해에서 비롯될 때가 많고, 오해는 같은 사안을 바라보는 서로의 다른 기억에서 비롯될 때가 많다. 파라핀의 쉽게 변형되는 성질은 기억의 성질이기도 하다. 하지만 사람은 기억이 정확하다고 믿는다. 이 문제는 우연히 나의 최근 관심사이기도 하다.
홍상수의 흑백 영화 <오! 수정>(2000)은 같은 사건을 출연진마다 각기 다른 시각에서 풀이하는 장면들이 순차적으로 제시되는 구성이다. 하나의 객관적인 사건을 인물마다 자기 주관을 투영해서 전혀 판이한 이야기로 구성한 장면들이 나온다. 당시에는 영화라는 허구의 장치가 만든 부풀린 과장 정도로 생각하며 그 영화를 봤다.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인간관계와 의사소통은 일견 투명하게 풀이되는 일상의 영역인 듯해도, 누군가의 왜곡된 기억 때문에 소통은 좌절되고 그로 인해 누군가는 부당한 상처를 받는다. 이런 인간관계의 본질은 직접 체험한 이만 알 수 있고, 겪어보지 못한 이에겐 다만 예술처럼 미지의 영역으로 남는다. 미지의 세계는 일상에 산재되어 있다. 이는 예술이라는 미지의 영역을 일상에서 발견한 뒤샹의 아이디어와도 연결되리라.
인간관계의 복잡한 경험을 가장 단순한 기본 도형의 조합과 변형으로 고백하기. 김수지가 내놓은 다양한 ‘도형의 초상’들을 바라보는 나의 두 번째 가설은 이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