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k: 백지희
백지희-생각과 마음의 말 풍선
(갤러리조선 3.17 - 4.9)
박영택(미술평론, 경기대교수)
유기체적인 원형과 타원들이 반복되게 겹치면서 회화만의 평평한 깊이와 색의 빛을 만들어내는 화면은 아름답다. 가장 기본적인 도형과 색채로 이루어졌으며 수고로운 손의 노동이 감각적으로 축적된 화면은 미묘한 공간의 깊이와 환영을 보여주는 한편 시간의 지층과 마음의 여러 겹, 생각과 말들의 헤아릴 수 없는 떠돎을 은유한다.
작가는 그려진 평면 안에 자기만의 공간을 부여하고 있다. 동그라미들은 무수하게 겹쳐지면서 선명하게 등장했다가 줄줄 흐르고 덮어씌워져 이내 흐려지는 등 사라짐과 출몰을 반복해서 보여준다. 그로인해 화면은 미묘한 공간, 깊이 있는 환영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화면은 단지 캔버스 천으로 마감된 납작한 평면, 단조로운 평면만도 아니고 즉물적인 물성에 머무는 것도 아니다. 사실 회화의 화면은 놀랍고 기이한 공간이다. 그것은 환영을 불러일으키고 보는 이의 시선에 호소하고 마음을 움직이며 모든 것을 담는 그릇이다. 누가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매번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 화면이고 그림이다. 백지희의 화면은 일종의 몸이고 마음이며 눈물샘이자 감정의 저수지, 일기장이며 책이다.
아울러 일정한 단위들(점, 원형이미지)이 모여 이룬 말 풍선이나 픽셀, 캡슐을 닮은 형태를 보여준다. 그것은 앞서 언급한 여러 의미의 표상들이다. 각각의 원형이미지들은 한계와 무한을 동시에 말하며 여러 시간의 층들이자 내밀한 마음의 결이며 떠돌고 부침하는 생각과 상념들, 눈물 한 방울, 응고된 감정의 윤곽, 수많은 말들, 개별적 존재들의 에고, 각자의 삶의 풍경, 그리고 그것들의 미묘한 관계망들을 암시한다. 그래서인지 원형의 형상들은 마치 말 풍성이나 여러 종류의 약 성분을 내장하고 있는 캡슐을 닮았다.
그런가하면 드로잉에서 볼 수 있듯이 그것들이 모여 이룬 흥미로운 형상을 풍경처럼 보여준 작품도 눈에 띤다. 여백이 두드러지게 강조된 화면에 군집을 이룬 점/픽셀들의 집합체는 작은 단위들이 모여 만든 독립된 세계상을 보여준다.
조금씩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지적인 시각과 정교한 표현력에서 빛나는 이야기 그림이자 고도의 은유가 빚어내는 격조 있는 추상회화를 만난다.
화면에는 일정한 크기의 원형(타원형)들의 구성이 이뤄내는 미묘한 균형과 긴장이 있다. 캔버스에 동그라미들이 첨가될 때마다 변화하는 긴장과 균형의 관계는 색에 의하여 수축, 팽창을 거듭 하면서 화면 전체가 모종의 에너지를 발산하게 한다. 그래서 색의 에너지에 의해 우리의 감각과 신체가 자연스럽게 감응한다. 저 안으로 은연중 빨려 들어가고 함께 흐르고 이동하고, 그리고 숱한 변화를 겪고 부침하고 넘나드는 순간들을 만난다.
그 공간은 의식의 흐름과 감정상태와 여러 시간의 중첩이 빚어내는 놀랍고 기이한 공간이다. 기초적인 도형과 색의 유희는 화폭 위에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화면 밖으로, 화면과 화면의 관계로 발전하며 보다 확장된 회화의 총체적인 공간을 연상시킨다. 그래서 새로운 공간을 파악하기 위한 그림이란 생각이다. 그것은 마치 심장의 박동을 닮았고 감정의 흐름을 은하수처럼 떠올려주며 여러 생각과 말들을 물처럼 보여주는가 하면 자기의 내밀한 감정의 순간들을 보석처럼 굳혀놓았다. 여러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삶의 스토리가 있고 압축된 감정이 있으며 많은 말들이 쌓이고 증가되어 흐르면서 그것들이 모여 이룬 완강한 자기 세계가 있다. 소통에의 염원과 불모가 혼재하고 축축한 감정과 응고된 아집들도 엿보인다. 어쩌면 이 그림은 자기정화에 관여한다. 마치 눈물이 없으면 눈동자의 세포가 말라죽듯이 이 그림들은 자신의 감정과 타인에 대한 관찰, 반응과 배려 그리고 의문과 조심스럽고 단호하고 섬세한 관찰에 따른 것이며 그를 통한 자기 생을 되돌아보고 이해하려는 시도에 가깝다. 자기 고백적이고 타자와의 관계에 대한 예민한 반응의 결정으로서 그림들은 단호하게 자리한다. 이렇듯 작가는 형식적 그림 안에 개인사적인 의미를 삽입했다.
백지희의 그림은 추상이면서도 매우 구체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는 셈이다. 형식적이며 건조한 추상화의 틀에서 벗어나 유연하고 말랑거리는 언어로서의 추상회화로 다가온다. 모더니즘적, 형식주의적 이미지에 에너지와 생동감, 언어가 첨가된 것이다. 작가는 회화의 근간에 충실하면서 그 추상회화를 내밀하게 자기화한다. 평면들 간의 균형에 대한 탐구와 색채의 순수성을 유지하면서도 그림이 여전히 어떻게 한 개인의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는 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