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ST: 이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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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루한 삶의 공간을 부유하는 군상
한 남자가 단색의 풍경을 뒤로하고 오르막을 힘겹게 오르고 있다.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지만, 흔들리는 그의 몸과 꾸부정한 자세는 그의 한 걸음, 한 걸음이 어쩔 수 없이 간신히 옮기고 있음을 대변한다. 남자의 이러한 힘겨운 발걸음 때문일까? 이 사진에서 한 남자를 반기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보인다. 뒤편에 자리한 우람한 건물도, 거리 한 켠에 허술하게 세워진 방진막도, 그리고 누군가 살고 있는 어떤 집의 담벼락도 그를 반기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 역시 상호간에 서로 반기지 않고, 이질적 상태로 존재한다.) 남자는 그렇게 상호 이질적인 요소들 사이를 힘겹게 부유하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는 변화에 적응하는 것도 아니고, 반복되는 일과에 지루해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평화롭지도 않은 공간. 상호 연계 없이 삶의 기본 조건만을 간신히 연명하는 비루한 삶의 공간에 한 남자가 힘겹게 부유하고 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조금 떨어져 조망하는 이호진이 있다.
비루한 삶의 공간을 '조금' 떨어져 조망하다
그간의 작업에서 이호진은 화면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큰 화폭을 차고 넘치는 강한 에너지로 가득 메웠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작가가 숨겨놓은 시각적 기호가 부유하고 있었다. 이 기호들이 작품의 주요한 의미를 형성하고 있지만, 정작 작가는 이 기호를 순간적이고 강렬한 에너지로 '반쯤' 덮어 버린다. 그의 작품에서 보일 듯, 말 듯 존재하는 기호는 표면 위로 솟아오르기도 하고, 표면 아래 숨어버리기도 하면서 관객을 작품의 내적 공간으로 끌어들였다. 그러나 이번 전시는 자신의 감정을 적극적으로 표출하기 보다는 비루한 삶의 공간에 부유하는 인물과 일상을 조금 떨어져서 '관찰'하며, 이호진은 이러한 공간에 '최소한'으로 개입한다.
청사진으로 헐겁게 프린트한 사진 속 이미지는 그대로 유지하고, 이호진은 그 화면 위를 자유롭게 '개입'한다. 그렇다고 이전 작업에서처럼 이미지를 숨기려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이는 관찰자로서 상호 이질적 요소들을 연결해주기 위한 노력이다. 비루한 공간을 부유하는 한 남자의 주변에 있는 방진막과 담벼락은 그 존재를 최소한으로 감추고 그곳에 수풀이 우거져 있다. 또 다른 사진에서는 재개발을 위해 삶의 흔적은 파괴되고, 흙과 돌덩이로 가득한 폐허 공간에 여전히 자라고 있는 무성한 식물을 그린다. 새로운 생명의 운동으로 가득해 보이는 공간. 그러나 식물은 비루한 공간을 뒤덮지 못하고 그대로 노출한다.
<0908 을지로>는 한 여름의 좁은 골목에서 볼 수 있는 흔한 풍경이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서 그들은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그들만의 축제를 열고 있다. 한 여름의 오후 시간에 쉽게 발견될 수 있는 이 장면 중에서 이호진은 '을지로'에 주목한다. 을지로는 주거지와 상업 지역이자, 소상공인과 대기업들이 공존하는 지역이며, 행인과 노점상이 무질서하게 교차하는 특수한 공간이다. 이러한 을지로의 다층적이고 무질서한 모습은 그의 작업에 고스란히 반영된다. 사진 이미지의 외곽선을 겹치고 흔들어서 드로잉하고, 다시 그것을 지우고 이미지를 삽입하여 대상의 존재감을 불확실한 세계로 이끈다. 이것은 화면 상단의 푸른빛과 잿빛이 공존하는 불안한 하늘과 만나면서 자신만의 시간을 즐기는 군상의 존재감은 더욱 상실된다. 이렇듯 이호진은 도시 공간을 건축공간으로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실존의 다양한 모습으로 읽고 있다. 실상 그들은 자신의 공간에서, 그곳의 논리에 순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곳은 무질서의 세계이며, 정작 그들은 그곳에 정착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상실한 체 부유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호진은 이번 전시에서 스스로가 도시를 부유하며, 그곳에서 획득한 오브제와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공사장에서 주운 천위에 도시 군상의 이미지를 그리거나 <기억>에서처럼 불현듯 삶에 개입하는 전단지를 콜라주하거나, 버려진 낡은 종이에 쓰여진 숫자를 조합한다. 존재적 가치가 소멸된 것들을 통해 이호진은 우리 사회의 명암과 병폐를 드러내고 그것을 냉소한다.
모든 것이 복잡하게 얽혀 우리 주변을 돌아가고 있지만, 사회적 시스템은 (그것이 온당한 방향으로 나아가건, 혹은 부당한 방향으로 나아가건) 완벽하게 구동되는 것처럼 인식된다. 사회적 시스템에 순응 혹은 거역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이 과정에서 자신의 존재론적 가치는 상실된다. 그렇다면 이 지점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이호진이 보여준 것처럼 우리는 사회적 시스템 안에서 부유하는 존재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존재론적 가치 상실을 인정하고, 조금 떨어져서 우리 주변을 다시 봐야하는 것이 아닐까?
이대범_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