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STAND IN GLASS UNDER CLOTH: 강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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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리지 않는 것들의 이름 찾기, 그리고 부르기
강주리는 생태계를 통해 인간과 인간이 아닌 모호한 경계, 자연과 문명의 구분 없는 사고방식, 온 유기체와 무기체의 주체화에 주목해왔다. 이러한 내러티브는, 그 형태는 바뀌고 있으나 본질적으로 같은 시작을 가진다. 인간을 이야기할 때 인간을 대상화하지 않는 상징주의적 접근으로 인간에서 동식물로, 또 무생물로의 확장은 이제 미술에서 하위개념으로 불렸던 장식미술까지로 이어져 더 큰 탈장르화를 시도하고 있다.
그의 작업에 관심을 기울이던 사람들은 이번 전시에서 새로운 조형적 시도를 발견할 것이다. 테이블 없는 테이블보,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은 유리 돔은 이전의 정물화 기반의 드로잉, 그리고 덩어리로써 나타나던 강주리의 설치 작업과는 또 다른 것이다. 이번 갤러리조선 전시에는 작품의 근간이 되어왔던 드로잉을 하나의 오브제로서 해석하며, 그와 동시에 드로잉적 요소가 담기지 않은 온전한 ‘오브제’가 등장하게 된다.
이름이 있지만 그것으로 불리지 않는 것들
‘다들 알지만 이름은 모르는 것’이라는 밈을 본적이 있는가?: 지관;휴지심, 귤락(albedo);귤에 달린 실, 스타핑(paper stuffing);선물상자 솜, 종이, 비닐, 천사채;회 밑에 깔리는 것, 곤포사일리지;농촌 마시멜로.
우리는 이것들을 지칭하고자 한적이 없기 때문에, 혹은 하지 않아도 됐었기 때문에 이를 부르기 위해서 두, 세문장으로 길게 설명하거나 엉터리의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우리가 그것을 부르는 ‘틀린’ 이름에도 벌써 이 물건들의 어떤 것에 속해 있다는 특성이 드러난다는 것은 또 하나의 흥미로운 지점이다.) 이러한 것들의 특징은 우리 옆의 무언가를 자연스럽게 유지시키기 위해 본래의 모습이나 역할이 변형, 개조, 끼워 맞춰진다는 것이다. 너무도 당연하게 있는 것들, 그리고 무언가를 돋보이게 해주는 것들에 대해 우리는 철저한 무관심 혹은 비관심을 보인다.
강주리의 드로잉을 보자면 ‘Dépaysement(낯설게 하기)’ 으로 인한 혼란이 다가온다. 그동안 인간의 관점에서 이용 가치로써 바라보았던 생물, 혹은 무생물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뒤집히며 마치 이름이 없었던 것들의 이름을 불러야만 할 때와 같이 충격이 따르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엄연히 이름이 있는 것들에 대한 아주 사소한 궁금증, 시선, 그리고 온전한 이름으로 불러주는 것의 의의. 그것이 이번 전시에서 작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좌대의 미학에 대한 의문 던지기
좌대에 올라가 있는 물건들은 신격화된다. 어느 황제의 반신상, 귀중한 보석, 도자기 등은 오랫동안 좌대 위에서 고귀한 어떤 것으로서 작용했다. 하지만 오브제의 미술관 입성으로, 좌대는 어느새 그 위상을 잃고 희화화의 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다. 오랫동안 조각의 정통성을 대표하던 좌대는 동시대 미술로 들어서면서 고루하고 재미없는 것에 대한 이미지와 함께 정통성을 비꼬는 사람들에 의해 소비되며 하나의 장식으로 전락하였다.
강주리는 좌대로 대표되는 ‘받치는 것’에 집중한다. 이 때 받치는 것은 물리적인 것뿐만 아니라 상징적인 의미를 포함한다. 그는 상징물로만 남아버린, 장식, 부속물이라고 불리는 것들에 주체성을 부여한다. 르코르뷔지에가 <오늘날의 장식 예술>(1925)에서 조악하다며 비꼬았던 장식이 가진 이런저런 색과 물성에 반기를 들듯, 강주리는 장식을 작품으로써 집중하며 그 고유성에 힘을 더한다. 이렇게 또 한번의 ‘낯설게하기 (Dépaysement)’를 통해 주체를 전복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