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ring: 이지선
김백균 / 중앙대 교수
한동안 우리사회에 소소하지만 확실하게 실현가능한 행복이라는 의미의 '소확행'이라는 단어가 유행하였다. 이루기 힘든 거대한 목표에 매여 끊임없는 고통에 살기보다는 일상의 작은 행복에 만족을 느끼며 살아가는 삶이 더 의미 있지 않을까하는 제안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을 표했다. 뛰어난 성취욕을 지녔거나 혹은 운이 좋은 소수를 제외하고 대다수 사회구성원들에게 한정된 재화로 이루어진 유한의 세계는 아무리 노력해도 해결할 수 없는 사회구조적 모순을 지닌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 모순이 잉태한 고통의 근원을 몇몇 근대의 지성들은 속도의 문제로 규정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보드리야르가 의미의 소멸을 정치적, 역사적, 문화적 사실이 가속화로 인해 본래의 공간에서 이탈하여 하이퍼 공간 속으로 휩쓸려들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은 속도의 문제를 현대인의 근원적 고통의 원인으로 진단했기 때문이다. 이반 일리히가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에서 에너지의 과잉소비에 기초한 속도가 어떻게 인간의 자율적 능력을 저해하고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키는지 폭로하고, '삶'이라는 추상적 개념에 앞서 '생활'의 중요함을 강조한 이유 역시 속도를 인간의 삶을 파괴하는 근본적 요인으로 이해한 것이었다. 또한 쓰지 신이치가 『슬로 라이프』에서 행복을 되찾는 방법으로 문명의 이기를 사용하여 빠르게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몸을 이용하여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삶을 제기한 이유 또한 세계를 느끼고 인지하기도 전에 이미 지나쳐버리는 현대의 빠른 삶이 행복을 저해하는 원인이라고 여긴 까닭이다.
유한의 세계에서 가치의 지향은 효율을 중시한다. 효율과 빠름은 유비(類比)관계를 형성하고, 효율의 세계에서 신속과 정확은 미덕이 되어 경쟁의 밑천으로 작동한다. 효율은 이해관계에 기반하고 있고, 그 이해관계가 곧 우리가 삶의 고통을 느끼는 원천이라는 통찰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로부터 있어 왔다.
분명 속도는 효율과 관계있고, 효율은 이해관계와 표리를 이룬다. 그러나 이러한 원리를 이해했다고하여 우리가 바로 삶의 건전(온전)성을 회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한병철이 현대인이 지닌 시대적 질병(고통)의 원인이 속도의 문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들이 의미의 중력을 상실해서 땅에서 이탈하고 서로에게서 멀어지고 있기 때문이며, 이것이 바로 오늘날 현대인들이 '신경성 폭력'에 노출된 사회에 살아갈 수밖에 없는 까닭이라고 말한 것은 뛰어난 통찰이라고 할 수 있다. 속도는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빠르거나 느림의 문제로 삶의 뒤틀림을 모두 설명할 수 없다. 따라서 빠른 세상에 대한 반동으로 제시된 "슬로 라이프"라는 대안은 그저 아큐정전식 정신승리법이나, 자기합리화, 혹은 자기 위안에 그칠 뿐이다.
이지선의 작업이 의미 있는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번 전시에서 보여주는 이지선의 작업은 가치란 무엇인가, 또 우리는 가치를 어떻게 가치로 여길 것인가, 우리가 가치라고 여기는 가치는 가치라고 여길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가의 문제와 그 가치에 기인한 진정한 삶과 실천의 문제를 다룬다.
이지선은 <The man in the museum>, <Heritage>에서 우리가 가치라고 여기는 가치는 이름뿐인 가치란 걸 보여 준다. 이름이란 실제가 아니다. 그럼에도 이름 이외에 그 가치를 달리 말할 수는 없으므로 가치라고 개념화 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가치가 가치가 되는 순간은 가치가 죽는 순간이다. 우리가 어떤 유물을 박물관에 진열하는 이유는 그 유물이 가치가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유물이 박물관에 놓이는 순간, 그 유물은 그 유물의 가치가 발생했던 시공간을 떠나게 됨으로써, 그 원래의 가치를 잃는다. 이제 그 유물에 남은 가치란 박물관이라는 새로운 시공간에 놓이게 됨으로써 그 시공간이 부여한 일방적(박제화 된) 가치만을 획득하게 된다. 유산이란 이런 것이다. 의미 있어 보이고, 가치 있어 보이지만, 사실은 땅에 떨어진 낙엽처럼 마르고 건조하고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떨어진 것이다. 더 이상의 생명은 없다. 생활도 없다. 낙엽의 진정한 아름다움의 근원은 오랜 인고에 있다. 봄에 잎이 나서 여름의 비바람을 견디고 난 정화이기에 빨갛고 노란 아름다움을 가졌다. 그 정화가 다시 외부의 힘에 의해 단련을 거쳐 걸러지고 남은 것이 유산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이지선은 고양이와 개의 속성과 이미지의 대비를 통해 삶의 문제를 다룬다. 그의 작업 안에서 고양이는 현실 세계에 녹아있다. 그의 작품 속 고양이는 고양이라는 개념화된 모습으로 공간과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공간에 녹아들어 그 세계와 합치하는 모습으로, 그래서 온전한 고양이 모습만을 따로 떼어낼 수 없는 형태로 존재한다. 공간은 시간과 떨어진 채 공간만으로 존재할 수 없으므로, 고양이는 이렇게 세계와 분절되지 않는 진정한 삶을 산다.
이에 반해 개는 분명한 개의 형태로 그림 속 가상의 세계에서만 산다. 그 이유는 개와 고양이의 속성에 있다. 개와 고양이 모두 인간과 유대관계를 맺는 가축에 속하지만, 개는 보다 더 인간과 친화적이고, 고양이는 독립적이다. 개는 생존을 위해 보다 더 인간과 친화적인 방식을 선택했다. 그 생존을 위한 이해관계가 개를 가상의 세계 속에 가두었다. 인간과 관계를 맺으면서도 그 인간에 종속되지 않는 태도가 고양이를 자율적인 존재로 만들었다. 그러므로 개념적 가치 혹은 죽은 가치가 아니라, 살아있는 진정한 가치란 상대적 속도의 문제가 아니라 중력의 문제와 관계가 깊다는 것이다.
태도로 전환되는 진정한 가치의 세계는 <A child with a balloon>이 보여주는 것처럼 무욕(無欲)의 개념적 인식의 세계를 벗어날 때만 접근 가능하다. 무욕의 세계에서만 정해놓은 목적의식이 생기지 않으므로, 목적의식에 의해 미리 답을 정해놓은 뒤틀린 세계에 속는 일이 발생하지 않는다. 이로써 우리의 생각이 삶과 분리되는 일이 없어진다. 세계와 내가 일치된 세계 속에서는, 즉 내가 세계 안에 존재하게 된다면 나는 특정 가치 안에 고립되지 않는다.
우리의 삶은 순간순간 선택의 연속처럼 보인다. 그러나 매 순간 어떤 선택을 하든 뒤돌아보면 후회라는 감정만 남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알듯알듯 알 수 없고,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삶의 문제에 있어서 우리가 언제나 곤혹에 처하는 이유가 의식과 세계의 분절 때문이라면 통합의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볼 충분한 이유가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