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mitage: 김진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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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만한 공허
이선영(미술평론가)
김진욱의 작품에는 형상 속의 또 다른 형상이 자리한다. 뭔가 조밀한 작은 것들이 와글와글한 화면은 숨은그림찾기처럼 드러냄과 사라짐이 교차 되는 역동적인 장이다. 세포들 또는 거품들, 또는 소용돌이 그 무엇으로 보이든 간에, 그것들 사이에서 또 다른 세포들, 거품들, 소용돌이들이 생겨나거나 사라진다. 분열과 합체를 거듭하는 듯한 작은 단위구조들의 흐름이 압도적인 인상을 자아낸다. 큰 얼개만 구상해 놓고 그때그때의 감각에 따라 채워진다는 점에서, 단위구조들은 단순한 장식적 패턴과도 다르다. 그러면서도 ‘벽돌을 쌓듯이’ 채워지는 이미지들은 예술가와 장인의 경계를 넘나드는 영역에서 만들어진다. ‘벽돌’이라는 비유에서 보이듯이 그의 작품은 일종의 동형관계를 바탕으로 한다. 더글러스 호프스태터는 인지과학을 주제로 한 저서 [괴델 에셔 바흐]에서 원래의 정보를 유지하고 있는 변형을 동형태(또는 동형관계isomorphism)라고 규정한 바 있다.
동형태로 이루어진 김진욱의 작품에서 각 부분들 간의 구조적 유사성은 위아래가 뒤집히거나 역 진행되고 단축되거나 확대되기도 한다. 섬세한 먹선으로 채워지곤 하는 드로잉에 기반한 그의 작품은 독일과 영국에서 오랫동안 수학하면서 섭렵한 많은 형식에도 불구하고, 그가 한국에서의 학부 때 동양화를 전공했음을 알려준다. 단위를 이루는 듯한 형태들은 기계적으로 시공간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이합집산하는 방식에 따라 다른 서사 또는 상징을 보여준다. 여러 색과 크기를 가진 동그라미도 김진욱의 작품을 이루는 형태소이다. 가장 단순한 도형인 원은 이후의 변형을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이다. 원은 동서고금을 통틀어 자아의 상징(플라톤은 정신을 구형에 비유했다)으로 간주 되곤 했는데, 그의 작품에서 원은 검은 달로 대표된다. 달 표면 같은 지형이 새겨진 큰 원은 유체적 속성을 띄는 형태소들에게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음력을 중시했던 동양인들이 직관적으로 깨달았듯이, 그리고 뉴턴으로 대변되는 근대 물리학이 밝혀냈듯이, 대양의 조석간만의 차이를 일으키는 운동은 달로부터 비롯된다. 김진욱의 작품에서 검은 달은 때로 블랙홀 같은 구멍이 되어 화면의 흐름을 조절한다. 원 및 원의 변형은 존재의 대연쇄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연결된다. 아서 러브 조이는 [존재의 대연쇄]에서 우주의 체계와 구조에 대한 관념이라할 수 있는 존재의 대연쇄라는 우주관을 소개한 바 있다. 그에 의하면 존재의 대연쇄는 무한한 수의 위계질서 속에 배열되어 거의 비존재에 가까운 가장 미소한 종류의 존재물로부터 모든 가능한 단계를 거쳐 완전한 존재에 이르기까지 무한한 수의 연쇄의 고리들로 구성되어 있다. 자연에 바탕 한 김진욱의 작품에는 자연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훌륭한 존재의 연결’(토마스 아퀴나스)이 깔려있다. 18세기에 절정을 이룬 이 사상은 세계의 충만함을 말한다.
아서 러브조이의 [존재의 대연쇄]에 인용된 바에 따르면, 충만이란 ‘신의 정신의 계시 이전에는 공허하고 공백이었던 지상이 이제 신의 빛과 증가하는 은총으로 가득 차 있다. 거기에서 대지는 더이상 공허하고 비어있지 않음’(플러드)을 말한다. 그러나 어디에서나 생명으로 꽉 차 있는 자연에 대한 믿음에는 진공과 공허에 대한 공포가 자리한다. 김진욱이 그려내는 충만의 세계는 그 반대의 것, 즉 공허에 대한 불안이 있는 것이다. 파스칼이 ‘이 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은 나를 두렵게 한다’고 말했을 때, 그는 신학적 사상이 쇠락해 가는 근대적 불안을 표현했다고 평가되었다. 물활론, 또는 범신론을 떠올리는, 만물이 촘촘히 연결된 세계는 근대에 와서 낭만주의적 변형을 거치며, 인간이 당면한 세계가 공허하고 차갑게 느껴질 때마다 변주되어 나타나곤 했다. 작가는 2017년의 전시 ‘Empty’의 작가 노트에서 이러한 연쇄망의 세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불교 화엄경에 나오는 인드라망이라는 그물처럼 세상 모든 것이 거미줄처럼 엮여있고 그 사이사이에 맺혀있는 투명한 구슬이 서로를 비추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라이프니쯔의 단자(單子)처럼(아서 러브조이는 존재의 연쇄의 관념이 가장 현저하고 가장 결정적으로 나타나는 라이프니쯔의 철학에서였다고 지적한다), 이 연쇄는 단자처럼 보이는 원과 원의 변주로 이루어진 총체이다. 작품 [Inside and outside of landscape-horns]의 동그라미들은 다른 작품들에서는 그 기본형태에 꼬리를 빼거나 싹을 틔우는 등의 방식으로 변신할 것이다. 검정 원인가 하얀 원인가, 또는 타원인가 등의 선택도 화면 속에서 여러 줄기로 진행되는 이야기와 관련되어 선택된다. 작가는 마치 바둑을 두는 사람처럼 몇몇 구성요소로 끝없이 다양하게 펼쳐지는 게임을 즐긴다. 관객의 시선에 의해 바탕 속에서 드러나는 것은 탄생에 해당한다. 원자나 미생물, 공기처럼 눈에 잘 보이지는 않지만, 이 세상에 편재하는 작은 단위들이 고물고물 움직이는 이미지는 생성과 소멸이 이루어지는 세계에 대한 강렬한 이미지이다.
유기적인 곡선들로 가득한 세계에서 몇 안 되는 직선적 요소인 수/지평선은 위와 아래의 관계를 현실성과 잠재성의 관계로 보게 한다. 화면에서 작가가 숨겨놓은 것들은 발견되어 현실화되기 전까지는 잠재적인 것으로 머문다. 작업 자체가 잠재성과 현실성의 거듭되는 왕복으로 이루어진다. 재현과 거리가 먼 그의 작품은 ‘제자리로 다시 돌아올 뿐인 기계적 반복이 아니라, 차이를 둔 반복’(질 들뢰즈)이다. 차이를 둔 반복은 탄생(복제)과 진화(변화)를 동시에 향한다. 이러한 쌍방향의 움직임을 통해 작가는 정지된 매체인 그림 안에 잠재적인 운동감을 부여했다. 무의식과 의식의 관계처럼 잠재적인 것이 수면 아래에서 올라오면 현실이 된다. 물론 그의 역동적인 화면구성은 심층과 표층을 고정하지 않는다. 양자는 언제든 자리를 바꿀 수 있다. 그는 이미지가 있는 화면 가장자리를 돌돌 말아서 표면만 있는 공간을 암시하기도 한다. 표면으로서의 세계는 3차원상의 일정한 부피를 가지는 유한한 공간에 무한을 도입한다.
작품 [Inside and outside of landscape-lake]에서도 나타나듯, 형태소들의 흐름 중 하나는 복합적 형태로 이루어진 끈이다. 이 끈은 여러 작품에서 역동적인 움직임을 만들어낸다. 아르누보(Jugendstil)를 떠올리기도 하는 출렁이는 끈은 마치 우주는 끈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현대물리학의 가설을 떠오르게 한다. 여러 계를 횡단하는 그의 작품은 무엇보다도 우주적인 풍경이다. 마가릿 버트하임은 [공간의 역사]에서 우주 전역에 흩어져 있는 거대한 ‘우주의 끈’이라는 모델을 소개한다. 그에 의하면, 이것들은 거대한 중력이 응축된 수백만 마일 길이의 줄과 판들로 은하계와 은하계 사이의 공간구조를 강하게 휘게 한다. 그러한 공간은 해양처럼 상대론적 공간이다. 파동, 기류, 그리고 소용돌이, 즉 별과 별 사이의 바다와 같은 공간에서 거세게 굽이치고 물결치는 거대하고 유동적인 4차원 곡면에 의해 부단히 변형된다. 마가릿 버트하임은 우주의 바다를 항해하는 선원은 성난 바다의 표면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고 조언한다.
김진욱의 작품 속에 뚫린 크고 작은 구멍들은 공간뿐 아니라 시간을 관통하는 여행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유동적 이미지는 건축처럼 치밀하게 구축된 것이다.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생각하는 이미지 중의 하나는 암자(庵子)이다. 그것은 은폐된 형상이 있는 작품들을 설명해준다. 생물학이나 인류학, 그리고 심리학에서도 관찰, 설명되곤 하는 은폐에 대한 그의 취향은 이전작품에도 발견된다. 그는 풍경 속 물에다 달을 숨겨놓기도(달이 비친 것이 아님)하고, 풍경 자체를 나무상자 안에 통째로 넣기도 했다. 로제 카유와나 라깡의 이론이 암시하듯, 배경과 형태가 구별되지 않는 은폐의 한 형식인 의태는 최면(홀림) 또는 죽음을 떠올린다. 작품 [A man behind a tree-1]은 화면 상단에 남성의 옆모습이 검은색 바탕 아래 확실한 외곽선을 드러내는 반면, 화면 하단에는 무늬로 가득한 남성이 숨어 있다.
위/아래의 위상적 상징을 생각할 때 잠재적인 상태가 현재적인 상태로의 변신이다. 이 작품에서 숨어 있는 인물이 속한 공간의 밀도는 더욱 높다. 100개의 가능성 중에서 한두개 실현하기 힘든 난이도 높은 삶 속에서 아직 드러나지 않은 것은 훨씬 더 무거울 것이다. 새로운 탄생을 위한 부글거림으로 가득한 예술 또한 원시지구의 대양에서 일어났을 법한 무수한 시행착오적 조합이 일어나는 장이다. 자연도 과학이나 예술만큼 무수한 실험을 해왔다. 영감이나 직관은 그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여주며, 김진욱의 작품에 자주 나타나는 블랙홀 같은 이미지가 맡은 역할이다. 작품 [A man behind a tree-1]은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처럼, 물거품에서 태어난 성스러운 존재를 떠올리는 신화적 풍경이다. 작가가 남성이니만큼 화면은 가득 채우는 형상들은 양기(陽氣)라고 해야 할 것이다. 물론 양기는 반드시 특정 성에 한정되기보다는 ‘만물이 살아 움직이는 활발한 기운’이라는 사전적 의미에 더욱 가깝다.
작품에 등장하는 검은 달을 자신으로 은유하기도 하니만큼, 생성을 위해 필요한 것은 음양의 조화라고 할 것이다. 중간중간 검은 원, 또는 구멍은 생성의 열기로 가득한 화면을 식혀준다. 또는 눌러준다. 때로는 또 다른 중심을 잡아준다. 그것은 연속적 움직임에 비약 또는 도약이 일어나는 단절을 도입한다. 이를 통해 잔잔한 이야기는 극적인 드라마가 된다. 그의 작품에는 이러한 중심들이 크기나 상태를 달리하며 존재한다. 마치 수평선같은 선 위로 솟구치는 흐름 하나가 도드라지는 작품 [An empty chair]에서 수면 아래에 해당하는 공간에 자리한 것은 여러 개의 검은 달이다. 서로 다른 크기는 화면에 추상적 원근감을 준다. 공간이 또한 시간이라면 작은달과 큰달은 창조, 즉 잠재적인 것의 현실화의 국면에 요구되는 수많은 시공간을 상징한다. 그의 작품에서 검은 원은 블랙홀처럼 차원의 이동을 가능하게 하는 통로이다.
규정할 수 없는 작은 무늬로 가득한 공간은 막처럼 돌돌 말리기도 하는데, 생성/소멸의 이미지는 접힘/펼침의 관계로 전이되곤 한다. 들뢰즈는 역동적인 바로크의 세계관을 탐구한 저서 [주름]에서 펼침은 주름들에서 다른 주름들로 나아가는 운동이라고 말했다. 들뢰즈의 방식으로 말하자면 김진욱의 작품은 무한하게 나아가는 주름을 보여준다. 그것은 ‘점에서 점으로가 아니라 주름에서 주름으로 나아가며’, ‘주름들을 포괄하고 있는 것은 또다시 주름이다’ (들뢰즈). 김진욱의 변화무쌍한 화면은 예측 불가능한 기상 현상을 떠올린다. 바람이 불거나 비나 눈이 오는 현상은 대기를 구성하는 입자들의 운동상태에 따른 것이다. 아마도 구름은 가장 보편적인 이미지일 것이다. 매 순간 변화하는 구름은 그의 작품 속 유기적 이미지처럼 고정된 경계, 특히 직선이 없다. 김진욱의 작품에는 운동방식이 달라지는 경계면이 한 작품에서도 많이 나타난다.
가장 가시적인 경계는 수(지)평선이다. 액체와 기체 간의 호환성은 수평선을 떠올리는 화면의 구조 속에서 활발하다. 작품 [Inside and outside of landscape-lake]에서 수평선 위로 격렬하게 상승 중인 무늬들은 바닷물이 기화되어 구름이 되는 연속되는 흐름을 떠올린다. 밀도의 차이는 운동을 만들 것이다. 중간에 훵 한 부분이 있는 작품 [Inside and outside of landscape-hunting]에서 화면 가장자리로 갈수록 더욱 다채로운 형태와 색은 빈자리를 채울 잠재적인 움직임을 만든다. 간헐적으로 칠해지는 색은 완성과 미완성, 또는 채움과 비움 간의 관계를 만든다. 가령 칠해지지 않은 형태는 미완성이나 여백이 연상된다. 칠해진 부분보다 그렇지 않은 부분이 많은 점은 그가 비움을 더 중시함을 알려준다. 빈 곳은 불안을 자아내지만 채움을 향한 설렘으로 충전된다. 충만하고도 아름다운 이미지,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풍부한 상상력과 기술은 황량한 분위기로 전형화된 현대미술과의 차이를 보여준다.
그렇지만 그의 작품에도 항구적인 과도기로 규정된 현대의 미술에 기본 정서, 즉 불안이 스며있다. 불안 역시 다른 형상들처럼 단지 숨겨져 있을 따름이다. 형식적인 면에서 볼 때 그것은 공백공포(Horror Vacui)증 적인 꽉 찬 밀도 감으로 나타난다. 그의 작품은 꽉 채워진 불안감인 셈이다. 프로이트는 [억압, 증후, 그리고 불안]에서 불안에는 애매하고 대상이 없다는 특징이 있다고 말한다. 불안이 대상을 찾아내면 불안이라는 말 대신 두려움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라깡 또한 불안이 먼저이고 공포증(phobia)은 특정한 대상에 초점을 맞춘 것(딜런 에반스, [라깡 정신분석 사전])이라고 해석한다. 불안은 삶, 특히 작업하는 삶 자체에 자리한다. 정신분석학에 의하면 불안의 원형적 체험은 탄생이다. 그런데 별다른 안전장치도 없이 거듭된 탄생을 요구하는 것이 바로 예술이다. 김진욱의 작품은 한 점당 한두 달이 넘는 긴 소요시간이 요구되지만, 작업의 내용은 불안이 깃들 틈을 주지 않으려는 듯, 한 장면에서 다른 장면을 한 이야기에서 다른 이야기를 빠르게 이어 간다.
작품마다 숨어 있는 크고 작은 인물들은 그다음의 무대를 준비하는 듯 대기 중이다. 그것이 관객의 지각에 의해 바탕으로부터 도드라지는 순간이 온다. 작가적 삶 또한 그렇지 않을까. 이번 전시도 마찬가지지만 작품 발표란 오랜 잠복기를 거쳐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는 순간을 말한다. 잠복기란 밑도 끝도 없는 모색의 과정이라는 점에서, 죽음까지도 담보하는 거대한 투입의 시간이다. 그것이 불안을 자아낸다. 그러나 작가란 이 기간이 필요불가결하다는 것을 안다. 그것이 없으면 변화도 새로움도 없기 때문이다. 작가는 ‘다른 대상이 숨어 있기도 하고 몇몇 상징적인 사물이 반복적으로 등장하기도 하는’, ‘복잡한 이미지들로 구성된 화면’이 ‘은둔과 치유의 공간을 구체화하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수평선이 다른 작품에 비해 위에 설정된 [Some anxious moments]는 어느 작품보다도 공기감이 없다. 푸르러야 할 수면도 찐득한 녹조를 연상시킨다. 그의 작품에서 불안감은 유기체적 형태와 대조를 이루는 직선(자연 속 직선인 수평선을 제외한다면)에서도 발견된다.
이 작품에서 유기적 형태들 사이에 책 모서리나 뾰족한 직선들이 간간이 보인다. 그는 서양 장기판을 떠올리는 그리드 구조를 유기체적 이미지와 대조되는 항으로 간주한다. 그 이미지는 흑과 백이 분명하다. 이미 정해진 게임원칙에 따라 플로차트처럼 다음의 흑백 선택이 기다리는 삶은 이제 특정 지역에 한정되지 않고 세계화 되었다. 어린 시절을 충청도의 시골에서 자연과 함께 보낸 작가에게 문명이나 도시를 떠올리는 직선은 다소간 긴장감을 야기한다. 이전의 것들과 의식적인 단절의 시기이도 한 십 수 년 간의 해외 생활도 편안하지는 않았으리라. 이방인의 삶이란 전혀 다른 상징적 우주 속에서 모든 것을 새로 취득해야 하는 운명을 가지기 때문이다. 뾰족한 모서리가 아래를 향하는 작품 [A point of sword]은 추락인지 공습인지 알 수 없는 급격한 움직임이 있다. 심리학자들은 두려움과 공격성의 밀접한 관계를 말한다. 공격성이 두려움을 낳지만, 두려움이 공격성을 낳기도 한다.
작품 [The end of the corridor]는 사각형 안의 또 다른 사각형을 보여준다. 울렁거림을 자아내는 사각형 공간 너머에서 밝은 방이 보인다. 관객은 이미 밝은 원으로 잠식되고 있는 화면 속 남자와 같이 두 공간의 차이를 감지한다. 물결치는 사각 체크 무늬 바닥 아래에서 위로 떠오를 준비를 하는 검은 달을 표현한 작품 [The rising moon]에서 다른 달도 떠오를 준비를 한다. 김진욱의 검은 달은 점을 크게 확대한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작가는 추상적 점을 천체같은 물리적 실재로 변화시킨다. 그것은 점을 부정하거나 점을 상대화시키는 더 융통성 있는 ‘점’이다. 점에서 점을 잇는 최단 거리인 직선적 삶은 단선적 사고와 행동을 강요하는 억압적인 요소이다. 사각 체크무늬가 대각선의 반을 차지하는 작품 [Up and down-1]은 아래의 유기적 형태와 검은 달들이 대조군을 이룬다. 시공간의 밀접한 연결은 여러 개의 수평선을 다양한 시간으로 보게 한다. 각자에게 떠오를 천체의 이미지는 일률적 잣대를 보편성으로 간주하는 강박관념으로부터 인간을 자유롭게 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