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hind the color: 박경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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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그림, 그리고 경계에서
글. 김인선 (스페이스 윌링앤딜링 디렉터)
2017년도에 처음 박경진 작가의 회화를 대면하였을 당시, 벽면을 가득 채운 거대한 풍경의 사이즈에 압도되었던 기억이 있다. 그 이미지의 스펙타클함으로 인해 내가 그림을 향하여 서있는 공간이 화면의 일부로 흡수되고 있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화면 속에 도색을 진행 중인 몇몇 인부들의 모습도 있는 어느 작업장의 풍경이었다. 꽤 묘사적으로 표현된 구조들에서 느껴지는 현장감은 당시 그림 앞에 서있는 관객들에게도 강렬한 인상을 주었음에 틀림없다. 이러한 견지에서 그 때 당시 박경진 작가가 만들어내는 이미지의 크기는 중요한 요소로 짐작된다. 더불어 이미지를 여러 겹의 구조로서 파악해 보면 이러한 경험을 또 다른 방식으로 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지의 가장 기본적인 배경이 되는 현실의 공간, 즉 촬영 스튜디오로 묘사된 회색빛 천장과 조명 장치 등은 대부분 캔버스 위쪽에 위치하는 풍경이다. 촬영 진행을 위하여 만들어진 가벽 구조물은 해당 벽면이 작가를 비롯한 인부들의 손으로 도색됨으로써 삭막한 창고 건물과 또 다른 겹의 가상의 공간으로 조성되며 이는 화면 중앙에 위치한다. 화면의 하단 부분에는 도색을 담당한 인부들이 배치되어 가벽을 사이에 둔 현실의 공감임을 드러낸다. 이 회화가 완성되어 전시장에 설치되었을 때에도 이러한 겹겹의 공간감은 여전히 작동한다. 관객은 세트장의 현장에서 도색 중인 인부와 마찬가지로 이 공간을 바라보면서 환영의 창을 들여다 볼 수 있는 현실 공간의 겹에 위치한다. 즉 관객은 눈 앞에 세워진 캔버스 너머의 가장 위쪽에 자리잡은 전시 천장 공간과 자신이 서 있는 캔버스를 마주한 바닥 부분까지 의식할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현실의 공간에 개입하면서 자연스럽게 구조를 만들어내는 회화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2019년 초, 근래에 다시 그의 작업실에서 대면한 이미지는 여전히 가벽 구조물의 표면에 도색을 하고 있는 작업 풍경을 대상으로 한 장면이었다. 그런 동시에 이전 작업에서 받았던 느낌보다 훨씬 화사한 색감과 과감해진 붓놀림이 두드러진 것을 볼 수 있었고, 여전히 현장의 이미지이지만 현장감 보다는 회화적 화면으로 인식되는, 크기가 작아진 캔버스들을 통해 작가가 대면하는 ‘현장’은 이전과는 다른 양상으로 다뤄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박경진 작가가 2016년부터 회화 이미지의 소재로 삼고 있는 작업 공간은 주로 남양주에 위치한 영화 혹은 뮤직비디오 제작을 위한 세트장이다. 그 현장에서는 수 많은 페이크 장면들이 만들어지고 폐기되곤 한다. 그와 인부들이 도색한 벽면은 최종적으로 만들어지는 영상 화면 속에서 실제 장소처럼 위장된다. 이 생업을 위한 도색 행위는 사실상 작가로서 캔버스를 대면하며 그려나가는 행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 이 현장을 소재로 할 당시의 작가에게는 예술행위로서의 화면과 생계를 위한 노동으로서의 행위가 구분되어야 했다. 작가는 현장에서의 일과를 마치고 개인적으로 촬영해 온 현장의 풍경을 캔버스에 옮기기 시작했다. 현장의 풍경은 온전히 자신의 이미지로 다루고자 하는 캔버스의 화면 속에서 소재로서의 대상으로 전환되었다. 이를 소재로 다루기 시작한 2016년과 2017년도의 작업은 다소 묘사적이다. 어둡고 무거운 색채는 현실의 중력을 인식하게 한다. 이는 현장의 분위기를 최대한 드러내면서 생업이라는 현실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더욱 부각시켜 그 현장의 관찰자이자 예술가로서의 자신을 분리하려 하였던 태도로 보인다.
박경진 작가의 본격적인 초기 작업이 진행되었던 2012년도 부터 2015년도 까지의 작업으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그 당시 작가는 이미 ‘생존’이라는 키워드를 다루고 있었다. 이는 일본의 후쿠시마 방사능 유출 사고로 인한 후유증, 국내의 구재역 사태 등을 통한 각종 인재(人災)들을 통하여 맞닥뜨린 일련의 사건들과 직접 닿아 있다. 방사능 유출 사건 당시 해산물에 대한 공포가 극에 달하고, 생선가게 아르바이트 중이었던 작가가 해고되면서 당장 생계의 위협을 받는다. 이 상황은 작가가 세상을 바라보게 하는데 큰 전환점을 제공한다. 작가는 그 이전에는 사회 문제나 정치 등에 큰 관심이 없었다고 회상한다. 그가 학교라는 안전한 울타리에 머물 당시에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문제들이 졸업과 동시에 작가에게 몰려들었다. 그리하여 자신의 그림 속에 우울하고 암울한 시사적 이미지들을 그려냈다. 하지만 인재의 현장을 파고 들어갈수록 이 세상의 무거운 현실에서 발생한 집단적 공포감을 자신의 손을 통하여 재현하기가 무겁고 버거운 과정이 되었다고 한다. 힘든 리서치가 반복되면서 느껴지는 피로감은 점차 그림의 대상을 자신에게 가까운 곳으로 눈을 돌리게 하였다. 그리고 현실 속에서 해결해야 하는 경제적 빈곤을 해결하기 위하여 노동의 현장으로 뛰어들었고 자신의 환경이 그림의 소재가 되었다.
2018년 이후 부쩍 밝아진 채도와 시원해진 붓놀림은 현장 조성 작업과 예술 행위를 더이상 분리하지 않고자 하는 의지를 선언하는 기호처럼 다뤄졌다. 그는 세트장에서 벽면이 움직이고 변하고 생성되고 사라지는 유기적인 가변성을 지켜보고 개입하면서 노동행위와 예술행위를 구분하고 있는 자신의 태도가 경직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화면 속에서 충분히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의 색채는 과감해졌고, 이전 작업보다 채도와 명도가 높아지며 중력이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처음에 자신의 이상에서 대척점으로 작동하는 세트장은 삶의 갈등 구조로 취급되었었다. 그러나 온전히 자유로와야 할 법한 캔버스 화면에는 그 대척점으로 여긴 현장의 공간을 더욱 적극적으로 쏟아 부었다. 그리고 자신이 대상을 삼고 있는 세트장의 유동적이고 유기적인 형태는 고스란히 작가 가진이 캔버스를 대면하는 태도로서 재배치되었다.
이후 세트장은 작가에게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하는 동력이 되었다. 그림을 향한 한계를 극복하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작가는 심지어 ‘세트장에게 빚을 졌다’고 표현하였다. 그가 선택한 변화는 자신의 그리기 행위가 어떠한 조건에서든 공통적인 언어와 태도를 유지하고 있음을 견지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작업 속으로 그의 현장은 더욱 적극적으로 개입되었으며 캔버스 속으로 들어온 현장의 장면은 원래의 묘사적 재현으로부터 보다 추상적으로 점차 변할 수 있었다. 그 와중에 그는 여전히 자신의 작품으로 구현한 작품이 현실의 자아가 중첩될 수 있는 ‘인물’을 배치하는 방식으로 추상적 평면을 무너뜨린다. 화면 속은 거대한 공간이 묘사되는 동시에 그것 자체가 이미지로 환원되는 듯 하지만 관객의 시선을 멈추게 하는 지점에는 항상 이 공간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누군가가 그려짐으로써 평면 추상으로의 변모를 통제하는 제스쳐로 읽힐 수 있다. 동시에 그는 실재 현장과는 동떨어져 보이는 색감을 사용하거나 실재 현장의 구조물을 캔버스 안에서 꼴라쥬하여 재구성하는 등 캔버스 앞에서 보다 자신의 동작을 크고 자유롭게 확장하였다. 이러한 선택은 작품의 현장성을 보다 주관적 행위주체로 이식(移植)할 수 있었다. 그리고 주변 환경이 작업의 겹으로 작용하였던 공간과의 인터렉티브하게 작용하는 방법론이 필수적인 요소가 아니어도 되면서 그림의 크기로부터도 자유로와질 수 있을 것이다.
박경진 작가는 어떤 식으로 스스로의 존재를 캔버스 속에 반영할 수 있을지 지속적으로 고민한다. 그의 거대한 캔버스 속에는 항상 인물이 존재한다. 얼굴이 묘사되지 않고 뭉게진 형태로 드러나는 이 인물은 작가 자신의 모습을 반영하는 존재이기도 한 동시에 화면이 시각적으로 환영화 되거나 추상적인 비물질의 함의를 극대화 하려는 순간 이를 제지하는 기능을 하기도 한다. 즉 작가가 생업을 위하여 작업하고 있는 영화용 세트장으로서 조성된 가벽 구조물의 표면에 채색된 화면을 자신의 캔버스에 옮기는 과정에서, 현실과는 다른 배치와 색채를 사용함으로써 비현실적 혹은 비물질적 화면으로 변모해가고 있는 화면 내에서 이 인물로 시선이 도달하면서 환영의 세계에서 빠져나오게 되는 것이다. 동시에 그는 이러한 노동 현장을 떠날 수 있는 순간이 오면 자신의 그림과 자신은 어떠한 관계에 놓일수 있을지, 소재는 어떻게 바뀌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가지고 있다. 작가는 세트장에서 현실이 아닌 화면을 만들어내는 작업을 한다. 동시에 이는 관객이 자신의 모습을 읽어내고 사건에 대한 다양한 감정을 끌어내어 사색하게 하면서 통찰력을 갖출 수 있도록 하는 영화 제작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 노동 현장을 소재로 삼아서 자신을 반영하였다면 노동 현장을 떠나간 시기의 자신은 또 어떤 지점에서 표출될 수 있느냐는 작가로서의 존재에 대한 고민이기도 하다. 박경진 작가가 이 현장을 떠나 또 다른 소재를 선택하여 그려낸 화면을 대하더라도 거기에는 늘 삶의 사건이 존재할 것이며, 관객들은 이를 바라보면서 스스로의 삶을 대입할 것이다. 그래서 결국 이 작가는 자신을 노동과 완벽하게 분리된 또 다른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지, 혹은 예술과 노동의 끝없는 동행을 다양한 방식으로 제시할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이지만, 그것이 어떤 결말이 되든 흥미로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