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Ice: 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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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ss release
글. 김현주(미술사, 미술비평)
이국 어느 나라의 이름들.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마케도니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몬테네그로, 코소보. 세계 지도에 평면의 인접국으로 펼쳐져 있는 이 이름들은 유고슬라비아 연방에서부터 독립했다. 유고슬라비아 연방이라면 올림픽에서 탄산마그네슘 가루를 두 손에 바르고 도마를 향해 뛰어 달리는 체조 선수가 떠오르며, 떠오르는 순간 공중 돌기를 한 후 아슬아슬하게 바닥에 탁 떨어지는 두 발, 이어 펼쳐 올리는 두 손이 연상된다. 뛰는 모습의 체조 선수지만 발자국 소리에서는 간절함을 간취한다. 저 너머에서 뛰어왔기에 목울대 넘어 토해내는 숨소리와, 저 너머로 뛰어가기 위해 바로 지금 눈앞에 당도한 이와 운명적인 눈빛을 나누는 이들을 담은, 안리 살라(Anri Sala)의 <1395일간의 흑백 (1395 Days Without Red)> (2011)1)은 1992년부터 1995년까지 1395일간 옛 유고슬라비아 연방국인 세르비아에 의해 점령당했던 보스니아 사라예보의 모습을 다룬다. 도시 곳곳에서 저격수와 폭탄테러로 인해 수많은 사상자와 부상자가 발생하고 건물과 시설이 파괴되었던 사라예보에서, 교차로를 건너기란 저 너머 언제 날아올지 모를 총알과 생존 사이의 겨루기에 가깝다. 숨소리, 발소리, 교차하는 눈빛, 달리는 그들로부터 줌아웃된 화면은 길 저 너머의 흰 천이 나풀거리는 모습을 담는다. 벽도 아닌 한갓 천이 그 거리에 나부끼고 있다. 사라예보 거리의 목숨을 건 질주와 사라예보 필 하모니 오케스트라 연주 장면이 교차하며 소리는 소리 이상의 각인(inscription)을 만들어낸다. 무엇인가를 새겨 넣는 것, 각인은 대충 흘려 쓰는 게 아니다. 묘비만큼이나 깊숙하고 절절하며 때론 단호하다. 모습, 소리로부터 소리가 꾹꾹 눌러 담긴 각인까지 먼 옛 유고 연방을 에둘러서 오기에는 습(習)으로부터 온 촉각을 얘기하기 위해서이다. 한진의 <흑빙(Black Ice)>에서 그간 소리의 청각성과 관련하여 다루어지던 글들을 촉각의 편으로 내쳐 가져와본다. 음악, 소리에 과문하여 외려 백색 소음을 선호하는 내게 2016년 그녀의 개인전 는 적절한 징검다리이다. 여전히 작가는 소리에 대한 의식(ritual)을 놓지 않고 있지만 기억이나 지속성에 대한 갈구가 이제 쌓고 헤집어내는 과정을 통해 촉(觸)으로 여기 한다. 촉은 참 그럴듯한데 닿는 것도 촉(觸)이지만 밝히는 것(燭)도, 깎아내는 것(劚)도 촉이니 말이다. 홑이불처럼 ‘흩(Heut)’날릴 듯한 처리의 방식들이 이제 퍽 두터워져서 무겁다. 무거워진 대기는 습하다. 좌우로 날렸던 공기는 고저의 기운으로 드리운다. 상하의 시점으로 재편된 작업으로 <해안선 #2>가 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업 중 하나다. 몇 번을 보았음에도 눈에 담아내는 데 만족하지 못하고 늘 손으로 쓸어내리고 싶은 충동이 드는 작업으로 파도가 밀려오고 쓸려나가는 해안에 서서 발끝을 바라보는 시점을 그려냈다. 파도가 그럴 리 없다 여기겠지만 탐스러운 스웨이드나 벨벳의 질감이 스며서 동물성 그림이 있다면 이런 것일까 상상해본다. 동물성 그림이라니, 폄하나 피비린 구석이 있다는 의미보다 식물의 수액이나 진액보다 피가 도는 살아있는 이들, 것들로부터 비롯하는 도리 없는 온기에 대해 생각해 본다. 그리고 사실 그녀의 이 이행을 비록 오해일지 모르지만 나로서는 반겨 맞이하고 싶다. 한편 동물성에 촉이 가 닿는 데에는 작업실에서 본 끌과 같은 도구 때문이기도 하다. 종이에 연필로 그린 작업에는 각종 지우개가 동반하지만 캔버스에 유화 물감이나 차콜을 사용하여 작업한 회화에서 표면을 헤집는 도구는 금속 끌이다. 을지로 골목에서 그녀의 아버지가 권해 준 도구는 끝이 뾰족함과 뭉툭함으로 계열을 이루는 한 묶음이다. 또한 완성 단계에 이르기까지 몇 벌의 덧입힘이 반복되는 그림의 중간 과정을 목도하였을 때 최종에는 정리되고 마는 선연한 물감의 속빛을 보았기 때문일까, 온건한 낯빛의 작품들은 군데군데 웅크린 것들이 종적을 감추어 온 두께의 표면이다. 이 그림에서 긁고 파내는 소리, 행위의 과정을 떠올리면 상상으로도 아프다. 이번 작업에서 촉각에 집중하면서도 촉각은 통각으로의 감각의 확장을 예비하기도 한다. 최근 작가는 강릉을 오고가며 석호(潟湖)에 대한 작업을 준비한다고 했다. 석호는 ‘바다 가운데로 길게 뻗어나간 모래톱(砂嘴) 또는 사주(砂洲)의 발달로 해안의 만이 바다로부터 떨어져서 생긴 호소(湖沼)’를 의미하데 그녀는 석호로부터 무엇을 포착한 것일까. 강릉 경포호(鏡浦湖)의 맑고 밝음보다 갈대 군락 습지의 뒤엉킴이 담보하는 ‘저만치’의 거리와 수풀 섶의 심연, 낮보다 밤에 가까운 어둠의 공간감일까. 낮보다 밤에 친연성을 갖는 전작들로부터 이 ‘친연성’의 내력을 되짚어볼 때 이 또한 삶의 습(習)과 연관하지 않나 조심스럽게 짐작해 본다. 천착한다는 게 깊이 살펴 연구한다고 알고 있는데 사실 후벼서 구멍을 뚫는, 시간과 태도, 그 이면과 표면의 총체이기도 하다. 천착을 통해 깊어졌다는 건 성숙함을 담보하지만 숙성해져 감을 품기도 한다. 성숙과 숙성은 찰나의 교차여서 화양연화가 삶에서 좀 더 ‘저만치’ 있기를 우리는 철들며 기도한다. 그녀가 어떤 걸음으로 오늘에 이르렀는지 이해해 봄직하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작업을 위해 분투함을 안다. 하지만 처연하기보다는 생생하기를, 관조하기보다는 닿기를 바라본다. 촉에서 오는 외마디를 운명처럼 덮지 말고 동물성의 생생함, 금속성의 쇳내와 같은 이질적인 요소들을 더 드러내고 전해주면 어떨까. 이미 있기에, 아직 요원한 것들이 분명 아니다. <흑빙>을 예비하며, 바이칼 호수 한 겨울 영하 40도보다 더 내려가는 혹한에서 돌고래 울음소리와 같이 들리는 얼음이 쪼개질 때 나는 소리를 떠올려본다. 낮과 밤의 기온 차는 특히 밤호수를 갈라놓는데 대략 60센티미터에서 1미터에 가까운 얼음덩이가 밤이면 찢기는 소리를 내며 마을까지 들려온다. 소리는 흩어지지만 찢기고 쪼개진 얼음은 육중하면서도 날카로워 치명적인 둔턱을 호수 곳곳에 남긴다. 봄이 되어 날이 풀리면, 이 조차도 여느 나라에서는 겨울이 자취를 감췄을 4월이 되어서야 얼음이 녹고 호수가 검고 푸르게 풀린다. 흑빙이 무엇인지 묻지 않았지만 내게 이 얼음은 소리로 각인된 이국이다. 내린 눈이 얇은 빙판으로 얼어붙는 형상을 흑빙이라 말한다고 하지만, 그녀의 흑빙이 내겐 꽤나 두텁게 느껴진다. 있었으나 홀연히 사라져 간 시각이 소리가 되었다 각인되었다. 파도 포말도 보았었고 석호 풀들도 보았었다. 보았던 것들이 들리다가 이제 꾹꾹 새겨져서 난처하고 아프다. 영아 성장통처럼 기억하지 못하는 아픔의 실체가 있는데 죽은 시인이 남긴 글에서와 같이 치병(治病)과 환후(患候)가 따로인 것2)처럼 오래 머물지는 말고 다시 툭 길을 떠났으면 하는 애정을 덧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