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ase haze: 김범중

16 - 30 June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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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ss release

 

장지위에 연필로 수많은 선을 그어서 만들어진 김범중의 작품은 매우 섬세하다. 미세한 것을 표현할 때 흔히 머리카락 굵기랑 비교하듯이, 어떤 관객은 그의 작품들에서 일정 간격으로 배열된 머리카락 샘플 같은 이미지도 연상할 수 있을 것이다. 머리카락이 너무 구체적 이미지라면, 굵기와 밝기와 질감의 차이가 무한한 계열로 펼쳐져 있는 모노크롬 드로잉이라고 해두자. 표면을 도포하는 수많은 선들은 그림의 뼈이자 살이고, 그림의 피하층이자 피부이다. 연필만으로 구현된 김범중의 모노크롬은 시각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촉각성과 청각성 같은 다른 감각과도 연결된다. 시각성, 특히 관념적인 시각성이 행하는 것은 환원이다. ‘회화의 조건’같은 모더니즘적 기준은 얼마나 대단한지, 지금도 회화의 ‘순수성’을 가늠하는 미학적 판결문같이 작용하곤 한다. 그러나 관념적 수사가 동반되는 추상적 환원은 미술을 결코 풍부하게 하지 않았다. 미술을 자율적이지도 자유롭게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저 뭐라도 갖다 붙일 수 있는 텅 빈 서판같은 것이 되었을 뿐이다. 
 
새로움에 역사라는 명목까지 더해진 모더니즘적 수사학에 남은 것은 이해관계와 맞물린 권력뿐이다. 화면의 평면성을 확인하는 그리드 구조, 흑백 톤으로만 이루어진 금욕적인 색조, 무한한 반복과 차이로 이루어진 수행성 같은 면모는 김범중의 작품을 모노크롬 회화와 연결 지을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 회화를 이루는 몇 가지 요소로의 ‘환원’은 확장을 위한 최소한의 단초 역할을 한다는 차이가 있다. 작품에 대한 해석은 이리저리 임의적으로 덧붙여지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그 안에 촘촘히 접어 넣은 것과 관련된다. 거기에는 시간에 관련된 것들이 많다. 그의 작품은 관념적 시각성에 대응하는 육체적 청각성의 감각이 두드러진다. 김범중의 모노크롬에는 흑백 사진 뿐 아니라, 피아노의 흑백 건반, 하얀 종이 위의 음표나 글자들, 밤하늘에 하얗게 빛나는 별 같이 다양한 연상의 고리로 확장될 수 있는 지점들이 있다. 그것은 관념적 시각성으로의 환원이 아니라, 공(共)감각으로의 확장이다. 
 
그가 자주 사용하는 그리드나 소용돌이 구조 자체에 확장의 방향성이 감지된다. 전자는 수직 수평으로, 후자는 나선형으로 확장된다. 하나는 무기적인 것이 다른 하나는 유기적인 것이 연상된다. 일련의 단위를 이루는 그리드 구조 같은 보이지 않는 틀 속에 하나씩 쟁여져 응집된 물질-에너지는 풀려나와 풀어헤쳐질 기회를 기다린다. 연필을 가늘게 갈아 드로잉 한 모노톤의 화면은 섬세하면서도 힘이 있다. 선들은 마치 별들의 궤도처럼 자기가 가야할 방향을 알고 있다. 작가가 그어놓은 잠재적인 수직/수평선의 한 칸에 자리하는 선의 뭉치들은 각기 다른 방향을 가진다. 한자리에 있어도 모두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처럼, 각각은 자기만의 궤도로 운동한다. 어디선가 들어오는 빛은 각각의 정류(定流) 상태를 조명한다. 그의 작품은 수도자가 경전을 읊듯, 서예가가 문자를 쓰듯, 연주자의 손이 익히 아는 곡을 연주하듯, 물고기나 새가 지구의 자기장을 감지하여 나아갈 곳을 감지하듯, 그렇게 확고하게 행해진 것이다. 
 
시간 속에 행해진 행위는 공간 속에 흔적을 남긴다. 일정한 크기의 공간인 화면에는 시간들이 빼곡이 들어차 있다. 어떤 작가는 시간을 표현하기 위해 주어진 공간 속에 숫자를 차례로 기록하기도 했지만, 조형언어는 숫자라는 코드보다는 더 풍부할 수 있다. 물론 풍부한 만큼 모호할 수 있다. 김범중의 작품에는 보이지 않는 시간의 흐름이 가시화되어 있다. 이에 비한다면 보이는 것/공간/정지는 유한성으로 묶어질 수 있다. 평상시에 우리는 시간이 아니라 시계를 볼 수 있을 뿐이다. 비가시적인 시간이 질적이라면, 가시적인 시계는 양적이다. 하나하나 손으로 행해진 산물은 무심한 시간의 기록과도 차이가 있다. 실물을 보면 연필에 의해 긁혀진 종이의 섬유들이 일어나 있을 정도다. 닥지의 섬유질이 마찰에 의해 표면을 벗어난다. 그의 작품은 이러한 흔적들로 인해 매우 촉각적이다. 특히 더 많은 연필 흔적들이 각인되는 그리드 경계부분은 거칠거칠하다. 미세한 그림들은 필촉 보다는 환영을 강조하면서 그 너머의 세계를 보라고 권하지만, 그의 작품은 미세함과 촉각성이 함께 한다. 
 
사방팔방으로 확장되는 이미지들이 귀로 들려온다면 촉각적일 것이다. 음에 대한 감수성이 뛰어난 작가는 음질의 해상도가 뛰어나면 음의 질감이 느껴질 수 있다고 말한다. 어떤 음은 차갑거나 따뜻하고, 어떤 음은 거칠거나 부드럽고, 어떤 음은 딱딱하거나 푹신푹신하다. 어떤 음은 심연으로 가라앉거나 공중으로 붕 뜨고, 어떤 음은 돌돌 말려거나 쫙 펼쳐져 있다. 현대사회는 음을 음원이라는 코드로 단순화시키려 하지만, 그렇게 환원될 수 없는 소리의 세계가 있다. 김범중은 추상적 코드가 아니라, 실재계에 있는 소리를 가시화 하려 한다. 작가가 집중하는 부분은 몸과 물질이 직접 만나는 실재계이기 때문이다. 그리드 구조 자체가 텍스추어를 주는데, 그의 작품에는 그리드 안에 또 다른 텍스추어들이 자리한다. 일어난 섬유질들은 마치 피부를 그렇게 긁혔을 때와 같은 강도로 이미지를 각인한다. 피부라면 그것은 상처다. 상처는 아물 틈도 없이 일정 시공간을 반복적으로 쇄도하다가 치유되지 않은 채 봉인된다. 
 
상처/치유란 현대문화를 설명하는 키워드가 될 정도로 널리 통용되는 개념--대체로 타자에게 준 상처 보다는 자기가 입은 상처만을 생각하는--이지만, 원래 그것이 원초적인 상처인 한 치유란 것도 불가능하다. ‘탄생 자체가 트라우마’(프로이트) 라면, 상처란 죽음에 이르러야 치유가 되는 것 아닌가. 역설적이지만 죽음을 인정하는, 그리고 죽음을 불사하는 태도만이 그나마 치유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 아닐까. 오늘날 ‘생업’이 아닌 예술에 몰두하고 있는 이들은 매 순간 그러한 죽음을 감지한다. 어두운 경계면으로 사라지는 선들의 반복이 있는 김범중의 작업에는 죽음을 끌어안는 태도가 있다. 밝음이 어둠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듯, 죽음 사이에 삶이 있다. 삶이 유한하다면 죽음은 무한하다. 두 무한 사이에 유한이 끼어있다. 화면이라는 일정한 표면을 충만하게(또는 허무하게) 채우는 것(또는 비우는 것)은 각기 분할된 영역 안을 순환하는 궤적들에 내재된 강도와 밀도다. 
 
그것은 작가가 투여한 에너지가 종이와 연필이라는 물질과 반응한 결과물로서, 그 자체로 작가의 현존과 부재를 증거 한다. 그것이 행해진 시간이 있었지만 지금은 사라졌듯이 말이다. 정밀한 명암의 계열은 주어진 자리에서 충만하게 맥동 친다. 칸칸이 나누어 놓은 것에 미세한 차이들을 부여하는 작가는 물질마다 다른 진동계수를 가짐을 강조한다. 외적인 질서와 균질함은 차이를 견인하기 위한 장치이다. 현실은 겉보기의 다양함과 달리, 기계가 돌아가는 단조로운 소리만 들려온다. 그러나 예술은 그러한 현실과 다른 소리를 원한다. 그의 그림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있다. 그것은 시간이 다가오는 소리, 그리고 멀어지는 소리들이다. 하나하나 그어진 선들이 쌓여 밤이 낮이 되고 낮이 밤이 되는 것 같은 변화를 야기한다. 변화가 일어나는 경계들이 있기는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정확히 확정지을 수 없다. 밤이 낮이 되는 순간을, 무지개 색의 경계면을 확정지을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