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ifling Moment: 안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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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세은이 라고 명명한 일련의 ‘풍경화’(풍속화)들은 나로서는 “매우 독특하다”고 할 수 밖에 없는 장면을 제시한다. 그것들은 ‘의미심장한 시간’이나 ‘특별한 장소’를 기록, 재현한 것이 아니다. 그런 까닭에 화가는 ‘사소한’ 또는 ‘하찮은’ 이라는 뜻을 갖는 ‘Trifling'이라는 단어를 택했을 게다. 물론 이 ’사소한 순간‘은 전혀 의미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예컨대 에는 동남아시아의 느낌을 간직한 이국적인 풍경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여기서는 여타의 ’이국적인exotic‘ 또는 ’키치적인‘ 풍경화들에서 우리가 접하는 ‘향수적 분위기’ 내지 ‘이국성의 만끽’을 좀처럼 느낄 수 없다. 의미가 없다고는 할 수는 없으나 ‘의미로 충만한’ 상태는 아니라고 하면 어떨까? “가치가 없다”고는 할 수 없으나 “가치로 충만하다”고는 할 수 없는 10원짜리 동전이나 생수병 뚜껑의 처지를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이런 까닭에 를 여느 풍경화나 풍속화처럼 재현된 내용이나 사건에 초점을 두어 접근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또는 큰 의미를 갖지 않는다).
따라서 나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이 화가가 자신의 대상(풍경)을 대하는 태도를 향한다. 이 경우 화가의 위치가 내 눈길을 끄는데 왜냐하면 그 위치가 대상을 대하는 이 화가의 ‘애매한’ 태도를 드러내는 것 같기 때문이다. 먼저 화가(그리고 관객)는 대상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있다. 그의 자리는 대상에서 멀리 떨어졌다고도 그렇다고 대상에 아주 가까이 다가갔다고도 할 수 없는 자리다. 그 자리에서는 탁 트인 전망을 확보할 수도 없고 대상에 침투하여 그 실상을 낱낱이 드러낼 수도 없다. 대신 다른 가능성이 열린다. 에 등장하는 ‘사람들’을 보자. 지금 서있는 자리에서 화가는 그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관계는 소극적이다. 그들 중 하나가 화가를 향해 시선을 던지는 정도다. 그 사람들과 적극적이고 밀접한 관계를 맺기에 화가는 조금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다. 즉 현재의 자리에서 화가는 확실히 눈앞에 존재하는 대상의 제약을 받지만 그 제약에서 벗어나 어느 정도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이로써 주체와 대상은 어느 한쪽이 일방적 우위를 점하지 않은 채 팽팽한 대결을 벌일 수 있다.
1920년대에 화가 나혜석을 괴롭혔던 어떤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천후궁>(1926)을 그릴 때 나혜석은 색채 문제로 고민했다. 그것은 ‘천후궁’이라는 풍경화의 대상이 ‘회색 기와(煉瓦)’ 탓에 “대부분의 색채가 한색(寒色)을 띠게 되어” 발생한 문제였다. 나혜석의 근심은 ”실체에 가까운 색만 쓰자니 화면 전체가 너무 찬 기운이 돌겠고“ 또 ”온색(溫色)을 너무 많이 쓰면 본체의 의미를 잊어버릴 것“이라는 데서 발생했다. 당시 나혜석은 주체와 대상 어느 한쪽을 일방적으로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양쪽 모두를 아우르는 ‘긴장의 회화’를 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안세은의 회화는 나혜석 회화의 근본문제를 계승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나혜석이 ‘중용의 색채’를 내세우면서 결국 양자의 절충적 화해(또는 타협)의 길로 나아간 반면 안세은은 그러한 화해나 타협이 가능하다고 믿지 않는 것 같다.
을 다시 보면 이 화가는 자기 풍경화의 대상(풍경)들을 주관적인 붓질로 채우지 않았다. 즉 여기서는 화가의 감정 상태나 몸의 궤적을 표현한 “자유분방한” 붓질을 찾아볼 수 없다. 대신 여기에는 대상의 윤곽(실루엣)을 일종의 지시틀로 삼고 찍어나간 무수한 점들이 있다. 따라서 에서는 ‘대상’에 대한 화가의 주관적 이해나 감정이 드러나 있지 않다. 하지만 그러한 “객관적” 제작 방식 때문에 그림의 대상, 곧 ‘사소한 순간들’은 명료하고 굳건한 양(量)과 질(質)을 갖게 됐다. 점을 찍는 화가의 행위를 통해 “그저 스쳐지나갈 뿐”인 사소한 순간들이 실제로 “거기 있는” 것으로 개시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이 화가의 전작인 <일회용 자아disposable identity>와 관련지어 볼 수 있다. 이 작업들은 기본적으로 ‘발견된 오브제들-이를테면 10원짜리 동전, 생수병 뚜껑, 솔방울 같은 사소한 사물들’을 계열체(paradigms)로 취해 ‘발견된 형식-케이크 아래에 깔려있는 하얗고 예쁜 종이받침의 패턴들’이라는 통합체(syntagms)에 아우르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그런데 이 양자의 결합을 통해 사물이나 패턴들이 갖는 ‘일상적 의미’는 축소되고(또는 지워지고) 대신 사물과 패턴들의 “지금 여기 있음”이 부각된다. 예를 들어 <일회용 자아>에서 장식 패턴을 구성하는 ‘10원짜리 동전’은 확실히 ‘10원짜리 동전’이로되 일상에 속하는 10원짜리 동전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것은 차라리 패턴을 구성하는 하나의 점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금속으로 보일 게다. 그것을 나는 파악하거나 이해해버리는 식으로 장악할 수 없다. 다만 그것을 지금 여기 내 앞에 “출현한” 것으로 마주 대할 따름이다. 어쩌면 에서 내 앞에 개시되는 ‘사소한 순간’이란 어쩌면 <일회용 자아>에서 내 앞에 낯설게 출현했던 사물과 패턴들에 상응하는 것이 아닐까?
<일회용 자아>나 에서 두드러진 접근방식, 즉 “정해진 틀에 따라 정해진 방식으로” 이미지를 객관적으로 구축해가는 접근방식을 안세은을 따라 ‘포장이사’에 비유할 수 있다. 이주를 위해 박스 안에 이삿짐들을 채워 넣는 전문가들은 대면한 사물들을 ‘일상적 가치(가격이나 용도, 개인적 기억들)’에 준하여 재단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오히려 그는 사물의 사물성, 곧 생김새나 크기, 무게에 훨씬 더 적극적으로 반응한다. 그 사물들을 결합하는 방식 역시 자기 몸에 각인된 패턴을 따르기 마련이다. 그렇게 사물들을 차곡차곡 쟁여 넣은 작은 박스들을 다시 차곡차곡 쌓아올려 컨테이너를 채운다. 그 거대한 컨테이너는 우리 눈에 하나의 거대한 사물이자 완성체-단일 구축물-로 보일 게다. 하지만 그 사물의 소유자, 곧 포장이사를 의뢰한 사람의 눈에 그것은 “단지” 단일한 구축물로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는 그 구축물도 보이지만 그 구축물을 구성하는 박스 하나하나, 사물 하나하나가 모두 보인다. 그것들은 비가시적이지만 또한 가시적인 것이다. 실제로 안세은의 삶이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주기적으로 옮겨 다니며 살아온” 경험들로 채워져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시사는 흥미롭다. 이 화가의 작업노트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등장한다. 주관과 객관이 전례가 없을 정도의 팽팽한 긴장상태에 있는 안세은의 회화장(field of painting)의 인식론적 토대, 아니 존재론적 조건을 시사하는 텍스트가 아닌가! 확실히 여기에는 짐을 꾸리는 사람과 짐을 푸는 자의 양방향의 시점이 공존한다.
홍지석 (미술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