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lfway Round The Wrist: 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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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목을 반 바퀴> 무명의 ‘우리’, 느슨한 연결
조은비
나는 이제가 자신의 작업에 관해 이야기하는 특유의 방식을 좋아한다. 이는 작가가 작품의 소재를 선택하고 그에 대한 자신의 상상력을 풀어내는 알리바이가 되는데, 그 솔직하고 투명한 언어는 내 기억 속에 그 작품을 특별하게 각인시킨다. 가령 작가는 자신이 몇 년 전 제주도에서―처음 흙으로 빚어 만든―둥글게 부푼 ‘알’ 형태의 토기로부터 여성들의 숨구멍이자 ‘입’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 ‘입술’들이 모여 앉아 토기 구멍에 숨을 불어넣는 상상을 한 작가의 이야기는, 나에게 쉬-익, 하는 미지의 소리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토기의 빈 공간은, 저마다의 들숨과 날숨이 드나드는 숨구멍인 동시에 아직 터지지 못한 그녀들의 발화(실현) 가능성을 내포한다. 이렇게 토기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또 다른 이야기들을 채울 수 있는 여백이 되는 것이다. 그가 본 풍경은 또 어떤가. <더미>(2012)에서는 도시 개발 현장의 폐허 더미에서 생명을 잉태한 부푼 배를 상상하고, 임신한 여성의 초상 <웃는 여자>(2012)에서는 그 도상이 나타내는 생명, 희망, 기쁨과 같은 전형성을 내던지면서 그와 정반대로 여성의 불안과 막막함을 서늘하게 표현한다. 이미지에 대한 익숙한 판단을 내리기 전에 그 이면의 서사적인 상상력을 끌어내는 작가에게, 세상의 모든 풍경은 양가적인 역설을 품고 있다.
인물에 대해선 더 구체적이다. 인물의 순간적인 동작을 여러 장면으로 나누어 연속적인 화면을 구성한 <뒤돌아보지 마라>(2015)에서, 저들은 한국 사회에서 여기저기로 “떠밀리는” 아주 보통의 여성을 표상한다. 화면 속의 인물은 어쩌면 여럿이면서 동시에 한 명으로, 특히 그녀(들)의 반쯤 비튼 자세는 외부(혹은 타자로서 ‘관객’)에 대한 양가적인 해석을 끌어낸다. 이는 누군가의 부름에 대한 응답일 수도 있고, 오히려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을 향해 전진하려는 의지일지도 모른다. 아직 확정되지 않은 상황 속에서 인물의 내적 갈등과 그녀의 고개 앞뒤에 존재하는 현실은 관객의 위치와 시점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개별 작품마다 품고 있는 나름의 서사는, 마치 내가 그의 (작품) ‘곁’에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해준다. 이것을 화가와 그의 화면, 그리고 관객 간 무형의 ‘연결됨’이라고 한다면, 기실 이야기를 짓는 일은 서로 무관한 것들에 맥락을 만들어 그것들을 마주 보게 하는 매우 적극적인 행위인 것이다. 더구나 저 이야기들은 작가 이제에게서 나에게로 전달되어 또 다른 각색을 거치고 살이 더해져 각자 방식의 왜곡과 변형을 거쳐갈 테다. 그리하여 새롭게 만들어질 그 ‘이야기’는 더 풍부한 힘을 얻어 작가 자신에게 그만의 맥락을 만들어줄 것이다. 내게 그의 작품이 삶과 회화가 긴밀하게 연결되는, 수행적 ‘그리기’인 것은 아마 그 때문인 듯하다.
물론 우리의 대화는 대개 완결된 문장이기보단 무수히 많은 ‘이, 그, 저, 아’ 따위의 체언(體言)과 제스처, 그리고 눈빛과 무언의 감정적 교류를 동반한다. 대화는 종종 침묵이 흐르거나 끊어지기도 하지만, 미처 문장이 되지 못한 이러한 비-언어는 작가와 나 사이에 잔여물처럼 달라붙어 있다. 그 감정의 결을 ‘우리’가 공유하는 어떤 정동이라고 한다면 이는 이제의 회화에 대한 나의 첫 번째 감상일 것이다. 이렇듯 대화와 이야기의 불가피한 오역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을 둘러싼 회화적 태도를 언어로 전달하는 것이 내 역할이라면 그것을 회화로 표현하는 것은 ‘이제’가 할 일이다. 이번 개인전 <손목을 반 바퀴>를 준비하면서 작가는 회화/하기를 둘러싼 이 같은 언어의 (비언어적) ‘잔여물’을 둘러싸고 그것을 풀어내는 방식을 고민한 것 같다. 그러니까 그의 관심은, ‘무엇’이라 지시되는 명료한 대상(목적어)이 아니라 이를 지시하는 손가락의 모양이나 손목의 동작, 그 움직임 따위의 ‘그 사이’에 놓인 것들을, 그리기를 통해 어떻게 드러낼지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이때 그것은 단지 무목적적인 행위가 아니라,―그녀와 내가 소통하고 감정을 나누는 데 필요한 정서적 제스처처럼― 기존의 언어적 체계로 드러내기 힘든 ‘무언가’를 발굴하는 일이다. 이 전시에서 작가는 이러한 정동의 표현을 위해, ‘그리기’라는 도구만으론 부족했는지,―작가의 표현에 따르면―일종의 “추상극”을 제안하는데, 이 극 속에는 이제껏 한자리에 서로 모여 있지 않았던 것들이 등장한다. 이를 나열하자면, 토기, 주름진 손, 여성 인물의 초상, 축대, 고양이, 벌판의 바람이다. 이는 더듬거리면 매끈하지 않은 질감으로, “세상을 이루고, 만드는 것”들이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시공간이 불확실한 미지의 장소에 놓여 있다. 빛이 한 줌에 불과하거나 잿빛 어둠으로 가득 찬, 마치 우주 공간과도 같은 화면에, 역시 제각기 다른 시공간으로부터 온 존재들과 파편화된 풍경이 작가에 의해 새롭게 접합되고 연결되는 것이다. 가령 여성의 젖가슴 사이에 토기가 솟아 나와 있고, 축대 아래엔 형체가 불분명한 고양이가 웅크려 있다. 화면 안팎의 열린 틈새로는, 생경한 손가락과 주름이 보인다. 이처럼 동그랗게 웅크리거나 포개진 곡선의 ‘비정형’은 형태적인 유사함을 넘어 내부와 외부의 모호함을 증폭시키고, 시점에 따른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마련한다. 전시 전반에 걸쳐 등장하는 토기의 이미지 역시 매끄럽지 않은 촉각성을 띠는데, 이는 다시 “토기, 주름진 손, 여성 인물의 초상, 축대, 고양이, 벌판의 바람”과 느슨하게 연결된다. 그리고 이렇게 모여 앉은 것들에 토기의 “노래하는 한숨”이 포개져 저마다의 입과 피부/살, 그 틈새로 새어 나온다. 작가는 주변적으로 지시하고 묘사하는 자신의 (회화) 언어, 그 ‘뉘앙스’를 통해 저 “이름 없는 것”들과 더 가까워지려 한다. 그러므로 <손목을 반 바퀴>는, 일견 추상적이지만 구체적인 인물과 사물, 풍경을 통해, 새로운 관계를 발생시키려는 작가의 일관된 의지를 드러내는 게 아닐까. 이는 또한 앞서 말한 작가 특유의 서사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공감과 연민, 자폐적이지 않은 소통에 대한 열망인지도 모른다. 요컨대 이러한 회화의 “추상극”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흐름과 리듬을 만들고, 그에 숨을 불어넣어 화면 안에 ‘온기’를 불러일으키는 작가 이제의 주술일 것이다. 그리고 이 마법은 계속해서 바라봐야만 할, 지금-여기에 움트는 이야기다.
조은비 / 독립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