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의 매혹: 이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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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매혹 (Emptiness...)
누군가(쟝 그르니에)의 소설처럼 언젠가 내가 보는 풍경 안에는 실제로 나는 없음을 알게 되었다. 사라지고 지워진 듯한 풍경과 흐릿해지고 있는 기억들에 대한 이야기는 현재의 존재와 존재성에 대한 불안과 자각을 야기시키곤 한다... 선과 악 행복과 불행 등의 극단의 다양성을 가지고 나눌 수 없는 삶의 연장선상에서 우린 존재감 없이 불안하게 서 있기도 한다.
이러한 지난 시간들 속에서 반복되는 타자로서의 삶을 바라보기와 소모적인 감정들을 가지고 존재 없는 풍경을 만들어 나간다. 현재의 사유적인 비움과 지워내기에 대한 갈망은 또 다른 새로운 것들을 향하거나 다른 것들을 채우기 위한 본인의 지점이 될 수도 있지만, 만들어지는 비움(텅 빈 공간) 자체에 조금 떨어져서 관조하는 삶에 대한 본인의 고민과 불안을 평온케 하는 아름다움이 있다. 생성과 분출을 반복하던 작업으로부터 흐릿하고 지워내는 작업으로서의 회유는 아팠던 나날만큼이나 버리는 즐거움이 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삶과 관계의 경쟁, 감정의 반복 속에서의 순환이 결국 존재를 대변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회화와 공간 작업을 만들었다.
Seeing a great view, without me_그 속엔 내가 없다
'Great' 라는 형용사는 '좋다', '위대하다' 라는 뜻으로 흔히 사용 되지만,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면 '크다', '많다' 라는 뜻이 먼저 정의되어 있다. 「크고, 많다」라는 객관적인 지표가 긍정적인 의미를 내포한 「좋고, 위대하다」라는 의미로 전이되는 논리적 과정 혹은 그 함정에 대해 생각해 본다. 내 작업의 크고 거대한 풍경 안에, 세계의 위대함에 대한 숭배 대신 거친 에너지의 충돌이 느껴진다면, 아마 그것은 이 논리에 대한 의심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곧 폭발할 듯한 거대한 도시의 풍경과 그 속의 소용돌이치는 에너지를 마주할 때 문득 그 풍경에 소외된 내가 느껴질 때가 있다. 그것은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내가 나 자신의 영혼을 느끼는 순간이며, 광기로 가득 찬 도시의 속도감 안에서 이상할 정도로 고요한 내 내면의 풍경과 마주하는 순간이다. 푸코의 논리를 빌리면 나의 존재는 타자를 통해서만 인지될 수 있는데, 그것과 마찬가지로 도시의 굉음과 파시스트적인 속도는 정적이 흐르는 내 내면의 텅 빈 풍경을 극적으로 드러낸다. 그 순간은 정의할 수 없는 이름으로 사라져 버리기도 하고, 눈앞에 펼쳐지는 다른 풍경으로 인해 금세 희미해져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 짧은 순간의 극적인 체험은 이상하리만큼 오래 남아 내 안의 남루함을, 민낯의 나를 대면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