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다: 김중일

7 - 28 December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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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ss release

 

만 삼년이 못되는 기간,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이 기간 동안 나는 예술을 전공한 학생들과 함께 공간을 공유하며 살아 본 경험이 있다. 그 기관에서 내 역할은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데 필요한 공학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었고, 그 기관에서 기대하는 것은 다양한 배경의 학생들이 공학 교육을 바탕으로 더 나은 소프트웨어를 개발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그 때 예술을 전공하는 내 태도는 그다지 편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나는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자유분방한 태도가 필요하고, 좀 불편하더라도 그들의 행동을 이해하고 참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으니 말이다. 
 
어느날 캠퍼스에는 작은 개집이 마련되어 있었다. 캠퍼스라지만 실내이고 카펫까지 깔린 곳에 둔 개집이니 실제로 강아지를 키우기 위한 것은 아니었고 누군가 장난인 것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제법 그럴듯한 모양을 갖고 있었고, 예술을 하는 친구들이 모여 있으니 장난도 참 그럴싸한 외관을 갖게 되는구나 생각했다. 그럼에도 마음 한편에는 공대에서라면 누군가 장난으로 마련한 그 공간은 아마도 며칠 지나지 않아 아무의 관심도 받지 못하게 되고, 먼지가 쌓였을 것이란 생각이 들어서 마음 한 구석은 불편함이 있었다. 
 
하지만 그 공간에는 작은 밥그릇이 놓이는가 싶더니, 쿠션이 놓이는 날도 있었고, 어느날은 그 모든 것들이 사라졌다. 사람들은 작은 변화를 알아채고 관심을 주게 되었고 생활에 대한 소소한 메시지들이 교환되는 장소가 되었다. 의미 없어 보이는 것이지만 생활의 한 부분이 될 때, 그것은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구나, 깨닫게 되었다. 
 
본격적인 예술작품으로 여겨지는 것들도 가끔씩 나타났다. 프로젝터와 음향기기를 이용하여 알고리즘을 형상화한 화면을 하루 종일 출력하거나, 모터의 단순한 회전을 이용해서 난해한 움직임을 보이는 인형이 한 켠에 서있는 날도 있었다. 작품이 세워지는 공간에 어떤 규칙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간판처럼 눈에 띌 것을 열망하면서 선정된 것은 아닌 것 같았고 횡단보도처럼 꼭 그자리에 있어야할 것 같이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이 공간의 어딘가에 또 어떤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하는 점에 기대하게 되었는데, 나는 살아오면서 내가 이런 것을 기대하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공학자의 직관과 신념으로 여전히 나는 편지가 이메일로 대체될 것이라고 믿는다. 사진의 해상도는 실물과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정밀해질 것이고, 삶을 구성하는 모든 물건들이 디지털로 기획되고 컴퓨터로 생산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지만 그것이 어떻게 우리의 삶에 흥미롭고 따뜻하게 융화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그럼에도 궁금하기는 하다. 봉투째 보관하던 옛 손편지처럼, 우리 시대의 이메일을 그렇게 따뜻한 시선으로 볼 수 있을까?  서랍속 깊은 곳에 두고 그곳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마음이 따뜻해질 수 있을까? 멋진 풍경을 고해상도 사진으로 찍었다고 해도, 우리의 기억속에 남은 추억도 그렇게 세세하게 남을 수 있을까? 컴퓨터로 매끈하게 다음은 이미지에서 고통스러운 창작의 흔적을 찾아갈 수 있을까? 
 
얼마전 김중일 작가는 소프트웨어 개발자 김덕성씨와 이메일에 대해서, 디지털 사진에 대해서, 그리고 컴퓨터를 이용한 그림에 대해서 작품을 발표한다고 전해왔다. 나는 여전히 예술에는 문외한이고, 그의 작품에 대해서 가타부타 논할 수준은 아니란 것도 잘 안다. 그래서 작품에 대해서는 할 이야기는 없다. 다만 궁금할 뿐이다. 왜? 그의 작품을 통해서 공학적인 성과물들이 우리 삶에 들어오는 길이 마련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길을 통해서 오는 것들은 무엇이든 그의 성격만큼이나 따뜻하고 친근한 모습을 갖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가 작품을 통해서 무엇을 보여줄까, 그의 작품이 또 나를 빙긋이 웃음짓게 할까? 
아마도, 예쁜 편지를 보내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할 것 같다. / 김종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