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sand on paper

임선구 Sun Goo Im

August 15-August 28, 2019

<종이 위에 검은 모래 Black sand on paper>

좋은 기억들은 형체 없이 쉬이 사라진다. 모두 사라지고 텅 빈 하얀 바탕에는 무던한 현 실만이 남아 부유한다. 환상이 되지 못한 잔여의 빈껍데기들을 모아 불을 붙인다. 타버린 재들의 그을음이 흑백의 선들로 평면 위에 드러난다. 믿지 못하는 혹은 믿을 수 없는 우화 의 파편들은 어떠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떠오르는가. 임선구의 이미지들은 기억의 파편들로부터 출발한다. 작가는 자신의 경험과 이후 왜곡된 기억을 재조합하고 그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빈틈에 환상을 채워 하나의 구성적 내러티브를 형성한다. 이 때 주제적인 그의 관심은 대체로 노인, 동물 등 소멸되고 방황하는 대상이나 주변부의 모순적이고 우울한 상황들에 있다. 외면하고 싶지만 반복적으로 상기되는 유미적 이고 강렬한 부조리의 인상들은 드로잉을 통해 작가만의 우화적 풍경으로 재구성된다. 얼핏 따뜻해 보이는 이미지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 숨겨진 특유의 그로테스크한 정서들 을 알아챌 수 있다. 작가는 의식의 깊은 우물에서 건져 올린 기억의 덩어리들- 그 축축하고 질척한 사건들을 뭉치고 뒤집은 뒤 보기 좋은 허구들을 섞어 하나의 아름다운 형상으로 조 형한다. 방법적 측면에서 이는 대상과의 적정한 거리감을 유지하면서 불편한 감정과 인상들 을 똑바로 마주하고 기록하기 위한 그 만의 전략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의 주제들은 다소 개인적으로 읽히지만 인간의 실존과 긴밀히 관계된다는 점에서 여전히 일반적이다. 그렇기에 작가의 작업들은 ‘우리’라는 이름 안에서 하나의 단단한 지반을 공유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번 전시 《종이 위의 검은 모래》는 임선구의 첫 개인전이다. 여기에서 그는 지난 4년 여간 진행한 흑백드로잉들을 선보이고 있다. 전시는 작가의 작업세계 전반을 담고 있으며 이 중 그가 시도했던 다양한 기법들과 표현형식들은 꽤 주목할 만하다. 초기 연필의 흑연을 녹이거나 문지르고 긁어내던 에스키스에서 최근 오일파스텔, 잉크 등을 이용한 콜라쥬까지 작가는 재료연구를 바탕으로 형식에 관한 실험적 태도를 보여준다. 특히 건식재료들이 물과 오일, 에나멜 같은 미디엄과 어떤 방식으로 결합되는지와 같은 물질성에 대한 탐구는 작가 만의 독특한 마띠에르의 바탕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종이의 두께, 캔버스 천, 나무 판넬 등 표면이 갖는 미세한 차이들을 감지하고 차별화하는 그의 감각은 표면의 변화와 확장을 도모함으로써 텍스쳐와 더불어 시각적 흥미로움을 제안하고 있다. 이 외에도 2017-19년도 사이 이미지들의 B컷을 기록한 작업을 모은 드로잉 북 또한 눈여겨볼 만하다. 이는 전시장의 드로잉들을 확대하거나 중복적으로 그려낸 대상들을 담고 있기에 관객으로 하여금 그림들 사이를 연결 짓거나 조합해보는 능동적 경험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마음 속 각자의 숲에 머물러 있다. 흐르는 망각의 강 옆, 떠나고자 하지만 여전히 멈추어 있는 자신의 그림자만이 보이는 곳이다. 깊은 밤 어두운 나무들 사이로 낯선 짐승의 기척이 들린다. 그것은 연민과 증오, 분노와 모순이 뒤엉킨 일그러진 감정들로부터 태어난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작업에서 그것의 모습에 환상을 덧입혀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한다. 이는 아마도 숲 속 깊이 숨겨둔 서로의 의식 사이로 관통하는 하나의 길을 찾기 위함 일 것이다. 이번 전시를 통해 관객들이 그 기이한 짐승의 고요히 빛나는 눈동자를 마주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천미림(독립 큐레이터)